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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르나르(오른쪽에서 두번째)가 실험실에서 연구에 몰두하고 있는 모습을 그린 그림. 그는 스승 마장디와 달리 전적으로 실험실에서만 산 사람이었다. 그는 마장디의 연구 방법을 더욱 심화시켜 오직 생체실험으로만 밝혀질 수 있는 문제들을 구상하고 이를 정교한 실험을 통해 입증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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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작가 꿈 키워나가던 소년 문학 권위자 충고에 의학으로 발길 돌려 실험생리학 창시자 수제자로 발돋움 “실험실 들어갈 때 상상은 던져버려” 실험의학 철학·윤리 원칙 세워
의학속 사상/⑩ 실험의학 기반 다진 클로드 베르나르 오늘날 의학과 생명과학의 가장 중요한 방법 가운데 한가지인 (생체)실험은 19세기를 거치면서 확고하게 자리를 잡았다. 헬름홀츠, 브뤼케 등 이른바 ‘베를린 학파’와 프랑스의 마장디도 실험의학의 기반을 다지는 데에 작지 않은 기여를 하였지만,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은 단연 베르나르(Claude Bernard, 1813-1878년)다. 그렇다고 19세기 이전의 의학이 실험과 전혀 무관했던 것은 아니다. 고대 로마의 갈레노스도 여러 가지 생체실험으로 인체의 기능을 규명하려 하였고, 17세기의 하비는 지금의 기준으로는 매우 조악한 동물실험으로 혈액순환을 입증하였다. 또한 18세기의 외과의사 존 헌터는 동물실험과 인체실험을 꾸준히 시행하여 주먹구구식이고 체험에 의존하는 성격이 농후하던 외과를 과학적 특성을 지닌 전문분야로 발전시키는 데에 기여하였다. 하지만 실험을 생명과학과 의학 연구의 중추적인 방법으로 자리잡게 하고 그 사상적?윤리적 기초를 다진 것은 베르나르였던바 그의 생애와 업적을 통해 그 구체적 과정을 살펴보자. 사람을 비롯한 모든 생명체는 변화무쌍한 주변 환경에 둘러싸여 끊임없이 그 영향을 받으면서 살아간다. 예를 들어 비교적 온화한 지역에 살고 있는 우리 한국인들도 겨울이면 영하 10도의 추위에 노출되고 여름에는 35도를 오르내리는 찜통 속에서 살아야 한다. 그런데 이러한 극심한 온도 변화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체온은 36.5도 안팎을 잘 유지한다. 즉 신진대사 등 생체의 온갖 중요한 작용이 일어나고 있는 세포는 온도뿐만 아니라 거의 모든 측면에서 비교적 일정한 환경에 놓여 있는 것이다. 이렇듯 환경은 우리 몸 바깥의 ‘외환경’과 몸 속의 ‘내환경’으로 구분할 수 있으며, 외환경의 변화무쌍함에도 불구하고 내환경은 ‘항상성’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베르나르는 현대의학과 생명과학의 핵심적인 원리이자 개념 가운데 하나인 ‘내환경의 항상성’ 원리를 체계화한 것으로 유명하다. 의학 발전에 공헌한 혹평베르나르는 1813년 프랑스 리용 근교의 빌프랑쉬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유소년기를 보냈다. 소년 베르나르는 고향의 한 약국에서 견습생으로 일하면서 문학도의 꿈을 키워나갔다. 그리하여 20살이 채 안되는 무렵, 베르나르는 극작가로 일생을 바칠 결심을 굳히고 파리로 갔다. 자신의 문학적 재능을 확신하고 있던 베르나르는 5막짜리 비극작품을 들고 문단의 권위인 생 마크-지라뎅 교수를 찾았다. 그러나 베르나르의 작품에 대한 마크-지라뎅 교수의 반응은 기대와 달리 매우 냉담했다. 실망스럽게도 마크-지라뎅은 베르나르에게 극작가로 성공할 가능성은 전혀 없으니 일찌감치 진로를 바꾸어 적성에 맞는 의학을 공부하면 좋을 것이라고 충고하였다. 마크-지라뎅은 베르나르에게 인생 초반에 커다란 좌절감을 안겨 주었지만, 대신 그의 안목은 의학의 역사에 작지 않은 공헌을 한 셈이다. 뒷날 베르나르의 저작물과 논문들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그 내용뿐만 아니라 문체와 구성에서도 뛰어나다고 하였는데, 마크-지라뎅의 혹평이 지나친 것이었는지 모른다. 어쨌든 극작가로 대성하려는 어릴 때부터의 꿈이 한순간에 허물어졌지만, 베르나르는 좌절을 딛고 삶 자체에 더욱 충실하게 임했다. 그는 마크-지라뎅의 충고를 가슴에 깊이 새겨 의학을 공부하기로 결심하였다. 그리하여 당시 프랑스뿐만 아니라 유럽 최고의 명문인 파리대학 의학부에 입학하여 1839년에 의사 자격을 얻었다. 기회는 노력하고 준비하는 사람에게 오는 것일 터이다. 아니, 누구에게든 찾아올 수 있는 기회를 준비하고 노력하는 사람만이 흘려 보내지 않고 자신의 것으로 만든다는 표현이 더 적절할 것이다. 대학을 졸업한 베르나르는 파리의 오뗄 디외 병원에 취직을 하였는데, 그곳에서 근대적 실험생리학의 창시자라고 할 마장디(Francois Magendie, 1783-1855년)를 만나 그의 조수가 되었다. 베르나르가 그곳에서 마장디를 만난 것은 가히 운명적인 해후라고 할 만한 것이었다. 베르나르가 생리학에 관심을 가지게 된 데에는 당시 의학계의 거목인 라에르의 역할도 컸지만, 역시 마장디와의 만남이 가장 중요하였다. 마장디와의 운명적 만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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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장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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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상익/서울대 교수·의사학 hwangsi@sn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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