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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5.12.22 22:10 수정 : 2005.12.23 17:11

베르나르(오른쪽에서 두번째)가 실험실에서 연구에 몰두하고 있는 모습을 그린 그림. 그는 스승 마장디와 달리 전적으로 실험실에서만 산 사람이었다. 그는 마장디의 연구 방법을 더욱 심화시켜 오직 생체실험으로만 밝혀질 수 있는 문제들을 구상하고 이를 정교한 실험을 통해 입증해냈다.

극작가 꿈 키워나가던 소년 문학 권위자 충고에 의학으로 발길 돌려 실험생리학 창시자 수제자로 발돋움 “실험실 들어갈 때 상상은 던져버려” 실험의학 철학·윤리 원칙 세워

의학속 사상/⑩ 실험의학 기반 다진 클로드 베르나르

오늘날 의학과 생명과학의 가장 중요한 방법 가운데 한가지인 (생체)실험은 19세기를 거치면서 확고하게 자리를 잡았다. 헬름홀츠, 브뤼케 등 이른바 ‘베를린 학파’와 프랑스의 마장디도 실험의학의 기반을 다지는 데에 작지 않은 기여를 하였지만,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은 단연 베르나르(Claude Bernard, 1813-1878년)다.

그렇다고 19세기 이전의 의학이 실험과 전혀 무관했던 것은 아니다. 고대 로마의 갈레노스도 여러 가지 생체실험으로 인체의 기능을 규명하려 하였고, 17세기의 하비는 지금의 기준으로는 매우 조악한 동물실험으로 혈액순환을 입증하였다. 또한 18세기의 외과의사 존 헌터는 동물실험과 인체실험을 꾸준히 시행하여 주먹구구식이고 체험에 의존하는 성격이 농후하던 외과를 과학적 특성을 지닌 전문분야로 발전시키는 데에 기여하였다.

하지만 실험을 생명과학과 의학 연구의 중추적인 방법으로 자리잡게 하고 그 사상적?윤리적 기초를 다진 것은 베르나르였던바 그의 생애와 업적을 통해 그 구체적 과정을 살펴보자.

사람을 비롯한 모든 생명체는 변화무쌍한 주변 환경에 둘러싸여 끊임없이 그 영향을 받으면서 살아간다. 예를 들어 비교적 온화한 지역에 살고 있는 우리 한국인들도 겨울이면 영하 10도의 추위에 노출되고 여름에는 35도를 오르내리는 찜통 속에서 살아야 한다. 그런데 이러한 극심한 온도 변화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체온은 36.5도 안팎을 잘 유지한다. 즉 신진대사 등 생체의 온갖 중요한 작용이 일어나고 있는 세포는 온도뿐만 아니라 거의 모든 측면에서 비교적 일정한 환경에 놓여 있는 것이다. 이렇듯 환경은 우리 몸 바깥의 ‘외환경’과 몸 속의 ‘내환경’으로 구분할 수 있으며, 외환경의 변화무쌍함에도 불구하고 내환경은 ‘항상성’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베르나르는 현대의학과 생명과학의 핵심적인 원리이자 개념 가운데 하나인 ‘내환경의 항상성’ 원리를 체계화한 것으로 유명하다.

의학 발전에 공헌한 혹평


베르나르는 1813년 프랑스 리용 근교의 빌프랑쉬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유소년기를 보냈다. 소년 베르나르는 고향의 한 약국에서 견습생으로 일하면서 문학도의 꿈을 키워나갔다. 그리하여 20살이 채 안되는 무렵, 베르나르는 극작가로 일생을 바칠 결심을 굳히고 파리로 갔다. 자신의 문학적 재능을 확신하고 있던 베르나르는 5막짜리 비극작품을 들고 문단의 권위인 생 마크-지라뎅 교수를 찾았다. 그러나 베르나르의 작품에 대한 마크-지라뎅 교수의 반응은 기대와 달리 매우 냉담했다. 실망스럽게도 마크-지라뎅은 베르나르에게 극작가로 성공할 가능성은 전혀 없으니 일찌감치 진로를 바꾸어 적성에 맞는 의학을 공부하면 좋을 것이라고 충고하였다. 마크-지라뎅은 베르나르에게 인생 초반에 커다란 좌절감을 안겨 주었지만, 대신 그의 안목은 의학의 역사에 작지 않은 공헌을 한 셈이다. 뒷날 베르나르의 저작물과 논문들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그 내용뿐만 아니라 문체와 구성에서도 뛰어나다고 하였는데, 마크-지라뎅의 혹평이 지나친 것이었는지 모른다.

어쨌든 극작가로 대성하려는 어릴 때부터의 꿈이 한순간에 허물어졌지만, 베르나르는 좌절을 딛고 삶 자체에 더욱 충실하게 임했다. 그는 마크-지라뎅의 충고를 가슴에 깊이 새겨 의학을 공부하기로 결심하였다. 그리하여 당시 프랑스뿐만 아니라 유럽 최고의 명문인 파리대학 의학부에 입학하여 1839년에 의사 자격을 얻었다. 기회는 노력하고 준비하는 사람에게 오는 것일 터이다. 아니, 누구에게든 찾아올 수 있는 기회를 준비하고 노력하는 사람만이 흘려 보내지 않고 자신의 것으로 만든다는 표현이 더 적절할 것이다. 대학을 졸업한 베르나르는 파리의 오뗄 디외 병원에 취직을 하였는데, 그곳에서 근대적 실험생리학의 창시자라고 할 마장디(Francois Magendie, 1783-1855년)를 만나 그의 조수가 되었다. 베르나르가 그곳에서 마장디를 만난 것은 가히 운명적인 해후라고 할 만한 것이었다. 베르나르가 생리학에 관심을 가지게 된 데에는 당시 의학계의 거목인 라에르의 역할도 컸지만, 역시 마장디와의 만남이 가장 중요하였다.

마장디와의 운명적 만남

마장디
자신을 과학의 넝마주이―개개의 지식을 모은다는 의미에서―라 자처했던 마장디는 자신이 관찰한 사실들을 추측과 가정으로부터 철저하게 분리하려고 노력한, 말 그대로 투철한 실험가였다. ‘벨-마장디 법칙’으로 유명한 마장디는 척수 후근에는 감각신경섬유가 들어 있고 전근은 운동신경섬유로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최초로 실험적으로 증명한 인물이며, 약물의 작용을 실험생리학적으로 연구함으로써 근대적 약리학을 창시한 사람이기도 하다. 또한 마장디는 임상의사와 연구자로서의 경력을 두루 거친 19세기 초반의 전형적인 의학연구자였다. 이러한 마장디의 지도를 받아가며 베르나르는 실험생리학자로서의 경력과 자질을 키워나갔다.

베르나르의 학자적 자질과 성품을 높이 평가한 마장디는 당시의 ‘연구중심대학’이라고 할 꼴레쥬 드 프랑스의 교수로 취임하자마자 베르나르를 조수로 채용하였다. 이곳에서 베르나르는 본격적으로 실험의학자로서의 생애를 시작하였는데, 특히 생체실험에 뛰어났다. 오늘날 생체실험이라 하면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많은데, 그런 만큼 윤리적인 측면이 강조되어야 할 것이다. 놀랍게도 베르나르는 이미 150여년 전에 “설령 과학과 의학의 발전에 기여하고 다른 사람들의 건강과 복지에 도움이 될지라도, 조금이라도 피험자에게 해로움을 줄 수 있는 실험을 해서는 안 된다”라는 오늘 한국사회에서 특히 강조되어야 할 원칙을 세우고 그것에 따라 자신의 생체실험을 수행하였다.

베르나르는 스승 마장디와 달리 전적으로 실험실에서만 산 사람이었다. 그는 마장디의 연구 방법을 더욱 심화시켜 오직 생체실험으로만 밝혀질 수 있는 문제들을 구상하고 그것을 정교한 실험을 통해 입증함으로써 커다란 성공을 거두었다.

철학·문학에도 커다란 영향

베르나르의 여러 뛰어난 업적 중에서도 간의 여러 가지 기능, 췌장액의 소화 작용, 췌장과 당뇨병과의 관계를 규명한 것들을 우선 꼽을 수 있다. 그리고 그는 신경계가 소동맥의 축소와 확장에 관여한다는 사실을 발견하기도 하였다. 특히 1865년에 펴낸 ?실험의학연구방법서설?은 그 뒤로 더욱 번성하게 될 실험의학의 기반을 닦아 놓은 것이다.

의학은 엄밀한 실험에 의하여 뒷받침되어야 한다고 설파하고 있는 베르나르는 그 책의 제1편 ‘실험적 추론’에서 실험과학 전반의 방법론을 기술했는데, 과학의 출발점은 관찰이고 종착점은 실험이며, 그 결과 발견되는 현상들을 합리적 추론을 통해 인식할 수 있다고 논증하였다. 제2편 ‘생물의 실험’에서는 우선 가설을 세우고 그것을 관찰과 실험을 통해 입증해야 한다고 하였다. 이어서 제3편 ‘생명현상 연구에서 실험적 방법의 활용’에서는 자신의 실험들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기술하였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진정한 실험의학자는 철학자이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였다. 그 책에서 보인 베르나르의 통찰은 의학뿐만 아니라 철학?문학 등에도 커다란 영향을 미쳤는데, 에밀 졸라의 ?실험소설론?은 대표적인 예이다.

베르나르는 “설명 체계란 자연에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인간의 마음 속에 있을 뿐이다”라고 상상력과 추론의 가치를 높이 평가하면서도 다음과 같은 말을 남긴 데서 알 수 있듯이 과학적 객관성에 깊이 몰두하였다. “코트를 벗을 때 상상도 던져 버려라. 그리고 실험실로 들어가라.”

황상익/서울대 교수·의사학 hwangsi@snu.ac.kr
1843년 위액(胃液)에 관한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베르나르는 몇해 뒤 소르본 대학의 생리학 교수로 임명되었으며, 1855년 스승 마장디가 사망한 뒤에는 꼴레쥬 드 프랑스의 교수 자리를 이어받았다. 1868년에는 프랑스 학자들의 최고 영예인 아카데미 프랑세즈의 회원이 되었으며, 자연사박물관장을 지내기도 하였다.

요컨대 베르나르는 수많은 동물실험과 인체실험을 통해 생리학적 사실들을 많이 밝혀내었을 뿐 아니라, 실험의학의 방법론과 철학적?윤리적 원칙을 확립하였으며, ‘내환경’과 ‘항상성’의 개념을 체계화함으로써 실험의학을 반석 위에 올려놓았다. 역사상 가장 뛰어난 생명과학자 가운데 한 사람인 베르나르가 보여준 과학적이고 (생명)윤리적인 자세, 그리고 진실 앞에 겸허한 모습은 오늘 우리 사회에 깊은 성찰을 요청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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