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9.08.09 06:01
수정 : 2019.08.09 20:31
환경생태학자 박지형 이화여대 교수
생태학과 근대철학·정치학 넘나들어
공존으로 균형 맞춘 ‘자연의 민주주의’
탐욕스런 사회에 변화의 길 보여줘
스피노자의 거미 박지형 지음/이음·1만5000원
근대 서양철학의 거두이자 “철학자들의 철학자”로 불리는 스피노자는 말년에 종종 거미를 관찰하며 시간을 보냈다. 그가 세 들어 살던 집 주인과 주변 사람들은 “거미를 찾아 서로 싸우게 하거나 파리를 거미줄에 던져 놓고는 싸움 구경이 너무 재미있어서 웃음을 터뜨리곤” 하는 스피노자의 모습을 보았다고 증언했다.
환경생태학자인 박지형 이화여대 교수(환경공학과)는 평생 인간사회를 천착했던 스피노자가 자연생태계에 관심을 보였다는 이 일화를 접하고서, “스피노자가 살았던 시대부터 현재까지 지속되고 있는 근대사회 인간사회의 모순을 자연생태계에서 관찰되는 갈등상황과 비교”해 보기로 했다.
우리는 흔히 치열한 생존경쟁에서 소수의 승자만 살아남아 모든 것을 독식하는 것이 ‘자연의 법칙’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생태학자인 그는 이것이 사실이라면 진화 과정에서 생물의 다양성이 오히려 증가했다는 점을 설명할 수 없다고 지적한다. 대신 그는 이렇게 묻는다. “지구의 다양한 생태계에 무수한 종이 공존하는 것은 제한된 자원이 소수에 의해 독점되기보다 비교적 고르게 배분되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 아닐까.”
|
18세기 최대의 경제 버블 사태를 소재로 만연한 배금주의를 풍자한 윌리엄 호가스의 판화 <남해 회사 버블>(1721년). 이음 제공
|
<스피노자의 거미>를 통해 저자는 자연이 알려진 바와 달리 ‘공존’에 소질이 있는 반면, 인간이 만든 자본주의 사회는 자원독점, 승자독식의 폐해가 갈수록 커져 온 현실에 주목한다. 이러한 현실을 바라보는 데 유용한 사상과 생태학 이론들을 제시하면서 ‘자연의 민주주의’로 인간 세상을 ‘공존의 생태계’로 바꿔낼 수 있을지 탐색한다.
저자는 크게 네 가지 질문을 화두 삼아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첫 번째 질문은 ‘근대를 이성의 시대로 부를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스피노자가 살던 17세기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은 부유한 상인들의 도시였다. 유럽 곳곳에서 종교의 자유와 경제적 기회를 얻기 위해 이민자들이 몰려들었고, 스페인의 유대인 박해를 피해 이곳으로 이주한 스피노자의 선조도 그들 중 하나였다. 풍요롭고 자유로운 암스테르담은 또한 부의 독점으로 인한 극심한 빈부 격차, 종교적 정치적 대립이 불러온 폭력과 광기가 넘실거리는 곳이기도 했다.
1672년 대표적인 공화주의 정치인 얀 더빗이 중앙집권적 군주정을 옹호하던 오란녀 가문 지지자들에 의해 살해됐다. 폭도들은 자신을 군주의 노예로 만들려는 오란녀 가문을 위해, 자신들의 자유를 지켜주려던 더빗을 교수대에 거꾸로 매달고 주검을 갈기갈기 찢었다. 더빗을 지지하던 스피노자는 왕당파의 애국주의에 휩쓸린 대중들의 광기에 큰 충격을 받았다. 그는 “야만의 시대를 극복할 수단으로 종교 대신 인간의 이성을 선택”했고, “일평생 이성의 힘으로 인간의 갈등을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하게 된다.
|
스피노자는 1672년 네덜란드 공화주의자 얀 더빗이 왕당파의 애국주의 선동에 휩쓸린 대중들에게 처참히 살해당한 사건을 목도하며 야만의 시대를 극복할 ‘인간의 이성’에 대해 고민했다. 얀 데 밴 ‘더빗 형제의 시체’, 암스테르담국립미술관 소장. 이음 제공
|
저자는 우리가 교과서에서 배운 것과 달리 근대는 계몽주의적 이상이 실현되는 과정이 아니라 ‘더빗 사건’처럼 무수한 폭력으로 얼룩진 야만의 시간이었으며 “이성이 지배하기보다 공포가 압도한 이율배반적 시대”라고 정정한다. 나아가 토머스 홉스, 존 로크, 장 자크 루소 같은 계몽주의자들의 삶과 사상을 다시 살펴보면서 이들이 기초해 탄생한 “근대의 대표 브랜드 민주공화정이 소수 엘리트 집단 이해를 대변할 수밖에 없는 태생적 한계가 있는 건 아닌지” 반문한다.
두 번째 질문은 ‘자연생태계의 자원배분은 민주적인가’ 하는 것이다. 한 생물은 서식지 안에서 자신만의 고유한 자리를 갖는데, 이를 ‘생태적 니치(niche)’, 또는 ‘생태적 지위’라고 한다. 다윈의 진화론에 따르면 유사한 두 종이 니치를 공유하면 주어진 환경에 더 적합한 종만 살아남고 나머지는 도태된다. 그러나 현대 생태학자들은 각 종들이 각자 고유한 니치를 차지하고 경쟁 종과 공존하는 ‘니치 분화’가 수시로 일어난다고 본다.
예를 들어 갈라파고스 제도에 서식하는 핀치새를 40년간 연구한 생태학자들은 유사한 먹이(씨앗) 때문에 발생할 수 있는 경쟁을 피하기 위해 핀치들의 부리 크기가 종마다 차이를 보이고, 특히 3종이 함께 서식하는 섬에선 핀치들의 부리 크기가 더 다양하다는 점을 발견했다. 같은 공간에 있는 식물들은 꽃을 피우고 씨를 뿌리는 시기를 조금씩 달리하는 ‘시간적 저장효과’를 통해 경쟁을 완화한다.
저자는 조셉 그리넬, 에벌린 허친슨, 스티븐 허멜 등 현대 생태학자들이 다윈의 진화론에 도전해 내놓은 새로운 학설과 연구성과들을 비전문가도 이해하기 쉽게 설명해준다. 그는 허친슨의 말을 인용해 “세상에 수많은 종이 공존하는 이유는 다양성이 높은 군집일수록 끊임없는 환경변화에도 군집 전체의 안정성이 잘 유지되기 때문”이며, 이처럼 “자연에선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자원의 ‘민주적’ 배분이 이루어진다”고 결론 내린다.
|
스페인의 아메리카 수탈에 반대하며 반식민주의 운동을 펼친 라스 카사스 신부가 그린 ‘에스파냐 정복자들’. 이음 제공
|
반면 인간사회에서는 소수의 사람이 ‘보이는 손’을 이용해 자원을 독점하는 일이 흔하다. 세 번째 질문 ‘거미와 콩키스타도르는 어떻게 다른가?’를 통해, 저자는 근대 초기 신흥 지배세력인 에스파냐의 ‘콩키스타도르’와 그 아래서 식민지 교역을 통해 부를 축적한 ‘상인 콩키스타도르’들이 아시아와 아메리카의 자원을 수탈하고 독점하는 과정을 자세히 들여다본다. 왕실의 지원을 받은 콜럼버스가 금의환향한 뒤 상인들은 자비를 들이거나 적당한 투자자를 찾아 앞다퉈 원정대를 꾸렸다. 저자는 이들을 “고위험 투자처로 뛰어든 제국 기업가”로 정의하고, 이들의 후예라 할 수 있는 글로벌 거대기업이 세계의 자본과 자원을 독점하면서 다수의 공존을 위협하는 현실을 우려한다. 거미는 생존을 위해 파리를 잡아먹지만, 콩키스타도르는 끝없는 탐욕 때문에 타인의 삶을 위협하고 공멸마저 초래한다.
|
탐욕과 폭력, 광기를 제어할 유일한 수단인 인간의 이성이 얼마나 잠들기 쉬운 존재인지를 경고한 프란시스코 고야의 판화 <이성이 잠들면 괴물이 깨어난다>(1899년). 이음 제공
|
‘자연에서 대안적인 자원 배분의 원리를 찾을 수 있을까?’ 하는 마지막 질문에 대한 답변은 진화생물학자 마틴 노왁의 주장으로 요약된다. “협력은 돌연변이와 자연선택을 보완하는 진화의 세 번째 원리”라고 주장한 노왁은 대립적인 집단이 상호연결을 통해 협력함으로써 이익이 증대된다는 점을 간단한 수식으로 증명했다. 마지막 질문은 결국 “새롭고 지속가능한 사회의 사회계약론은 과연 무엇이어야 하는가”로 이어지는데, 저자는 스피노자, 홉스, 칸트 등 철학자들을 총동원해 그 길을 모색하면서, 이 책을 계기로 더 많은 사람이 관련 논의에 참여해주길 고대한다고 말한다.
이미경 자유기고가
nanazaraza@gmail.com
광고
기사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