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9.08.16 06:01
수정 : 2019.08.16 20:25
조선시대 이념과 배치 ‘해동화식전’
안대회 교수가 최근 발견해 번역
무일푼서 거부되는 등 9명 사례 담아
해동화식전-조선 유일의 재테크 서적, 부자 되기를 권하다 이재운 지음, 안대회 옮김/휴머니스트·1만5000원
‘보리밥과 풋나물을 알맞게 먹은 뒤에/ 바위 끝 물가에서 실컷 노니노라/ 그밖에 나머지 일이야 부러워할 것이 있겠는가?’ 윤선도가 그의 앞에서 시조 ‘만흥’을 읊었다면 “이 무슨 개 풀 뜯어 먹는 소리인가”라고 응수했겠다. 조선 영조 때 선비 이재운이 쓴 <해동화식전>은 ‘안빈낙도’를, 먹고사는 데 애쓰지 않는 무기력하고 무책임한 삶의 자세로 비난하면서 ‘가난은 악덕이고 부는 미덕’이라고 주장하는, 당시로써는 파격적인 책이다. 1750년 무렵 쓰인 이 책은 정조 때의 학자 이규상이 사마천에 비견되는 저술로 평가하며 “근세 100년 사이에 이런 작품이 없다”고 극찬했지만 270여년간 존재 자체가 묻혀 있었다. 안대회 성균관대 교수(한문학과)가 이를 발견한 뒤 번역하고 관련 논문도 발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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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에 그려진 <태평성시도>의 일부. 조선 사회가 지향하는 이상 사회의 모습을 담아 성 안의 생활상을 그린 작품이다. 각 계층의 인물들이 상업, 농사 등에 종사하는 모습을 그렸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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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선비들은 관직을 통해서만 부와 명예를 추구했는데, 관료의 소망을 이루는 자는 기껏 만명에 열이나 백이었다. 그럼 나머지는 어떻게 먹고 살았나? 평생 관직의 꿈을 포기하지 못하고 이리 기웃 저리 기웃하다 실의에 빠져 죽었다. 벌이가 없는 선비라면 당연히 생업을 꾸려야 하는데 선비에게 농사는 부끄러운 일이고 장사는 상상도 못할 일이었다. 늙은 부모와 갓난아기가 줄줄이 배를 곯아도 시조는 만들어 읊을지언정 조선의 선비에게 돈벌이는 ‘악덕’이었다.
이 같은 세태에 대해 저자는, 가족도 지키지 못하고 이웃에게 베풀지도 못하고 나라에 제대로 세금도 내지 못하는 가난이야말로 ‘만악의 근원’이라고 비판한다. “가난한 자는 관아에 내야 할 세금이나 환곡조차 제때 내지 못하니 충성스럽다 할 수 있는가? 이쪽에서 꾸고 저쪽에서 빌리느라 경황이 없고 거리낌 없으니 청렴하다고 하겠는가? 육친이 서로 떨어져 떠돌아 헤매는데도 속수무책으로 구해내지 못하니 효도하고 우애하고 자애롭다 하겠는가? 속으로는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있어도 남을 구제해주고 싶어도 힘이 없고, (…) 남에게 돈이나 곡식을 빌리고 약속한 날짜가 지났어도 갚지 못한다. 그를 인자하고 의롭고 신의가 있다고 하겠는가? 부모 살아 계실 때 잘 모시고 돌아가시면 상을 잘 치르며, 제사 지내고 혼사를 치를 때 슬픔과 기쁨의 감정을 곡진하게 표현하는 일도 못하니 예절 바르다 하겠는가?”라며 따져 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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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원 김홍도(1745~?)가 그린 풍속도화첩에 실려 있는 <행상>.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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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어떻게 재물을 모을 수 있는가? ‘화식전’이란 제목은 ‘재물을 모아 부자가 된 사람들의 이야기를 엮은 책’이라는 뜻을 담고 있다. 제목에 충실하게 무일푼 혹은 거지, 고아에서 거부로 성공한 9명의 사례는 이 책의 백미다. 남으로는 일본, 북으로는 오랑캐와의 무역과 대부업을 벌인 고아 출신 거부, 좁쌀 한 알도 목숨처럼 아껴서 부자가 된 구두쇠, 쌀 때 사서 비쌀 때 되파는 경영으로 거상이 된 부부, 오직 신의와 충성으로 사람들의 믿음을 사서 재물을 불린 종과 거지, 짚신을 판 돈으로 산 닭 한 마리를 정성스레 키워 종국엔 돼지 3000여 마리로 불린 평민, 직접 보습과 가래를 잡고 여느 농부보다도 앞장서서 농사를 지어 만석지기가 된 선비 등이 그들이다. 이들의 공통점은 이랬다. “하늘이 정한 때보다 앞서 움직여 좋은 기회를 놓치지 않았고, 사람의 힘을 다 발휘하게 하면서도 땅의 이점을 잘 살렸다. 재물을 줄일 때는 재나 흙처럼 흩어버렸고, 이익을 챙길 때는 금이나 옥처럼 거둬들였다. 변화를 일으키는 수완은 신령할 지경이었고, 재물을 잡아 지키는 일에는 자물쇠보다 견고하였다. 따라서 부를 쌓아올려 풍족하게 사는 기술을 능란하게 구사할 수 있었다.” 지은이는 부에 이르는 5가지 덕목을 의지, 지혜, 용기, 정성, 신의로 정리한다. 이 중 네 가지를 갖추어도 한 가지가 부족하면 부에 이를 수 없다고 단언한다. 오늘날의 워런 버핏이 읽는다면 “아이고, 내 말이 그 말이요”라고 할 법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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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동화식전> 경진본의 첫 면. 휴머니스트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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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료 진출에 실패한 남인 서파 지식인이 쓰고 조선의 지배적인 사상인 유학과도 정면으로 배치된데다 당시 사회 역시 이 같은 사상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책은 오랫동안 잊혔지만, 이규상의 평가처럼 문장은 뛰어나고 주장은 명쾌하며 근거는 논리적이고 사례는 재미나다.
김아리 자유기고가
ari930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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