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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경식/도쿄경제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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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레스타인 아이 아흐마드 그애 아빠는 태어나기전 ‘순교’했다 X마스 선물을 고르자니 심란하다 아흐마드야, 산타클로스는 없단다 어른들한테 속지 말고 리얼리스트가 되어라
심야통신 올해도 2주일밖에 남지 않았다. 더웠던 여름의 기억이 멀지 않은데 겨울이 벌써 달려왔다. 내가 사는 도쿄 교외 K시는 넓은 은행나무 가로수 길로 유명한데, 바로 얼마 전까지 샛노란 단풍을 자랑하던 은행도 지금은 완전히 옷을 벗고 크리스마스 장식전구로 치장했다. 일본이라는 나라는 참 별나서 기독교 신자는 총인구의 1%도 되지 않는데 크리스마스 만큼은 국민적 행사처럼 돼 있다. 내가 어린애였던 1960년대 초반은 일본사회의 고도경제성장기에 해당한다. ‘모레쓰(맹렬) 사원’이니 ‘이코노믹 애니멀(경제동물)’ 따위가 당시의 유행어였다. 크리스마스란 회사원들이 왁자지껄하게 평소의 스트레스를 털어버리는 날이라는 인식이 일반화돼 있었다. 사회 전체가 묘한 열기에 사로잡혀 있었다. 번화가 어디든 새벽까지 소란이 끊이지 않았다. 술에 취한 아버지들은 집으로 돌아갈 때 가족에게 그나마 속죄할 양으로 자그마한 선물과 크리스마스 케이크를 산다. 밤 깊어 귀가하면 아이들은 이미 자고 있지만 그 베갯머리에는 산타클로스가 줄 선물을 넣을 양말이 놓여 있다. 다음날 아침 아이들은 깨우기도 전에 먼저 일어나고 아버지들은 아직도 가시지 않은 두통에 시달리며 또 회사로 출근한다. 신앙과는 전혀 관계없는 일본 특유의 크리스마스 풍경이었다. 하지만 이건 일반적인 일본인 가정 얘기다. 당시 일본 기업은 당연한듯 민족차별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재일 조선인 중에 안정된 대기업 사원은 많지 않았다. 대다수 재일 조선인 가정은 빈곤층이었으나 설사 그렇지 않은 경우라 할지라도 자영업이나 가내공업이 많았기 때문에 크리스마스를 가족끼리 즐기는 분위기와는 인연이 없었다. 우리 집에서는 크리스마스 케이크를 항상 이브 다음 날에야 근처 제과점에서 샀다. 팔다 남은 것을 싸게 살 수 있었기 때문이다. 어머니가 씻지도 않은 김치 자르던 칼로 잘라주셨기 때문에 우리 집 크리스마스 케이크엔 언제나 마늘 냄새가 배어 있었다. 조금이라도 더 큰 것을 차지하려고 싸우는 통에 늘 형제다툼이 벌어졌다. 학교에 가면 일본인 급우들은 양말 속에 뭐가 들어 있었다는 둥 서로 자랑하면서 산타클로스가 정말 있는지에 대해 소란스럽게 떠들어댔다. 내게는 자랑할 선물은 없었지만 그 대신 어른들의 위선에 휘둘리지 않는 조숙한 리얼리스트가 될 찬스를 맞았다. 40여년이 지난 지금 버블(거품)경제의 붕괴와 긴 불경기를 거쳐 밤의 번화가에서 떠드는 회사원 모습을 거의 볼 수 없게 됐다. 그 대신 현관 앞이나 창에 장식전구를 달아 놓은 집들이 눈에 띈다. 아이들이 조르는 통에 부모가 사줬을 것이다. 아이들은 학교에서 누구 집 장식전구가 제일 예쁜지 서로 자랑할 것이다. *아흐마드(Ahmad)에게 줄 선물을 사려고 장식전구로 치장한 상점가를 걸었다. 아흐마드는 우리 부부가 맡은 아이다. 올해 초등학교 6년생인 아이는 레바논 남부의 팔레스타인 난민촌에 있다. 4년 전 우리 부부는 그의 양부모가 됐다. 2001년 9·11 사태가 주저하고 있던 우리에게 결단하도록 만들었다. 양부모라곤 해도 법률적인 양부모는 아니다. 일종의 난민지원운동이다. 양부모로 등록된 사람이 주로 하는 일은 빈곤가정의 아이들에게 중학교 졸업 때까지 교육 지원금을 보내는 것이다. 현지와 일본 NGO(비정부기구)가 제휴해서 다달이 지원금 보내는 일을 책임있게 중개해 준다. 그 금액도 별로 많지 않다. NGO는 맡은 아이와 그 가족의 소식을 정기적으로 전해 준다. 지원하는 쪽은 사진이나 엽서, 또는 자그마한 선물도 보낼 수 있다. 값비싼 물건은 보내더라도 배달되지 않을 수 있다는 주의를 받는다. 실제로 3년 전 손목시계를 보낸 적이 있으나 그 아이에게 가지 않았다. 아흐마드에게는 아버지가 없다. NGO가 준 신원조사서에는 아버지는 그가 태어나기 3개월 전에 ‘순교’한 것으로 기록돼 있다. 구체적으로 어떻게 죽었는지 나로서는 알 길이 없다. 어머니와 형 두 사람, 누나 두 사람 등 모두 5인 가족이다. 일가의 생활은 청소부로 일하는 어머니의 변변찮은 벌이와 여러 기관에서 주는 원조 덕에 가까스로 유지되고 있다. 최근 전해진 소식으로는 누나 한 사람은 어머니를 돕기 위해 학교를 중퇴했다고 한다. 아흐마드 일가는 1947년 제1차 중동전쟁 때부터 난민이 됐다. 이스라엘 건국으로 약 70만 명의 팔레스타인인들이 난민이 됐다. 죽은 아버지가 1968년생이라 하니 아흐마드는 난민 제3세대든지 어쩌면 제4세대일지도 모른다. 60년 가까운 세월 동안 이처럼 세대를 거듭해오면서 팔레스타인 난민 총수는 현재 400만명이 넘는 것으로 추산되고 있다. 1948년 유엔 결의 194호는 팔레스타인 난민의 조속한 귀환을 촉진할 것이라고 큰소리쳤으나 이스라엘은 지금까지 이 결의를 완전히 무시해왔다. 이스라엘의 공식입장은 저들 팔레스타인인들은 ‘자주적으로 퇴거’했기 때문에 ‘난민’은 아니라는 것이다. 샤론 정권이 연출한 ‘가자지구 철수’라는 싸구려 연극을 보고 세계가 ‘화평으로 가는 제1보’ 따위의 헛소동을 벌이고 있는 중에도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 땅을 깊숙이 난도질하는 분리장벽을 계속 쌓아 점령을 기정사실화하고 있다. 난민에게는 희망의 조짐조차 보이지 않는다. 이런 불의를 세계는 언제까지 방치해둘 것인가? 우리가 실로 얼마나 무력한가. 멀리 일본에서 배달돼온 우편물 꾸러미를 풀어 보고 환히 웃고 있을 아흐마드의 모습을 상상하면 뭔가 보내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해진다. 하지만 무엇을 보내야 좋을지 모르겠다. 애초에 그에게 선물을 보낸다는 행위 자체가 가당찮은 속임수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장식전구로 꾸며진 거리를 걸어가면서 우리 부부는 심란하다. …우리 아들 아흐마드야, 산타클로스는 없단다. 어른들에게 속지 말고 리얼리스트가 되거라. 번역 한승동 선임기자 sdh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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