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5.12.29 18:43
수정 : 2005.12.30 16:16
말글찻집
‘언문’을 두고 흔히 ‘전날 훈민정음을 업신여겨 일컫던 말’로 알고 있다. 그런 점도 있겠으나, 가끔은 이런 ‘정 관념’을 벗어던져야 실체가 제대로 보인다.
우리가 쓰는 말·글 이름에 배달말·우리말·한국어·국어·조선말·고려어, 언문·언서·반절·국문·조선글·한글·배달글 들이 있으며, 암클·중글로 일컫기도 했다. 훈민정음·정음은 분명 글자이름이되 ‘말·소리’를 일컫는 말이어서 갸웃거리게 하는 바 있다. 옛글자에 고조선 적 ‘가림토’가 있는데, 정인지가 옛글자를 본떠 훈민정음을 만들었다고 한 언급(字倣古篆)이 여기에 가닿는 것으로 보인다.
언문(諺文)이란 ‘사람들이 늘 하는 말을 적은 글’이다. 그것이 사대모화자가 숭상하던 진서(眞書·한문)와 견줘 쓰다보니 낮잡는 인상이 있다. 하지만 말에 어찌 높낮음이 있겠는가. 글자로서는 편의·과학성에서 한문이 언문의 발바닥이지만 말이다. 국어사전들이 통상 ‘언문’을 “‘상말을 적은 글자’란 뜻으로 전날 ‘한글’을 속되게 이르던 말”이라고 푸는데, 그 풀이에 무리가 따른다.
‘상말’은 무엇인가? ‘상놈들이 쓰던 말’이란다면, ‘양반·귀족’이 쓴 말이 따로 있다는 얘긴데, 과연 그들이 쓴 말이 따로 있었던가? 몇몇 궁중말을 빼고는, 그들만 쓰는 말이 달리 있었을 턱이 없다. 그러니 ‘상말’이 상놈만이 아니라 양반·귀족 두루 쓰는, 곧 ‘백성들이 절로 배워 자연스럽게 하는 말’이 된다. ‘입/주둥이’처럼 낱말 중에는 욕으로나 낮잡아 하는 말이 있는데, ‘상말’과는 다르다.
최근 <조선시대 언문의 제도적 사용 연구>(한국문화사)란 책에서 저자 김슬옹은 ‘조선왕조실록’(27대 1967권 948책)에서 947건의 ‘언문’ 기사를 찾아내 쓰임의 실태를 짚은 바 있다. 여기서 ‘언문’이 나라에서 만든 공용문자인 훈민정음을 일컫는 말이었으며, 한문이 공용문자로서의 비중이 높았지만 교화·실용 정책 쪽에서는 언문이 더 떳떳하고 널리 쓰였음을 밝혀냈다. 임금의 행정·발표·외교문서에서도 언문을 쓴 바 있고, 왕실·사대부 집안 여성한테는 언문이 주류 문자였으며, 백성들도 언문으로 된 상언·서장·소장으로 의사표시를 했고, ‘언문’이란 이름 역시 ‘비칭’이 아니라 ‘통칭’이었음도 짚어낸다. 언문과 관련된 낱말 갈래로 언간·언찰·언교·언록·언요·언해·언석·언번·언역 들이 있었다.
‘언문’은 “전날 우리나라 백성들이 일상적으로 하던 말을 적는 글자, 곧 ‘훈민정음’을 달리 일컫던 말” 정도가 될 성싶다.
최인호/한겨레말글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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