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5.12.29 20:42
수정 : 2005.12.30 1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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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성각/소설가, 풀꽃평화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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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는 언급하기도 싫고
‘피디수첩’은 취재윤리 어기고
‘프레시안’은 ‘국익’ 운운 아쉽고
’한겨레’는 황우석을 제2창간 상징인물로 삼고
아무도 생명과학 자체에 대해 논하지 않았다
녹색 에세이/달려라 냇물아
세밑의 대한민국은 참 우울하다. 농사짓던 사람이 둘씩이나 방패에 찍혀 죽었지만 책임자는 처벌되지 않고 있고, 법원은 새만금 갯벌 죽이기에 손을 들어주었다. 그 일들도 참으로 어이없지만, 우리 사회를 이렇듯 무거운 집단우울증에 침몰시킨 일은 무엇보다도 줄기세포 소동이다. 어떤 이들은 한국사회가 공황상태에 빠졌다고 표현하기도 했다. 검찰조사를 방불할 분위기로 진행된 서울대 조사결과와 관계없이 빨리 만들어진 국민영웅은 허망하게도 단명했다. 추락하면서도 그는 곱게 추락하지 않고 “인위적 실수는 했지만 원천기술은 있다”며 날개를 퍼덕였다. 영웅의 추락이라기에는 추한 궤변이었다. 그의 파멸에도 불구하고 용서할 태세가 되어 있었던 난치병환자들은 “미치도록 그를 믿고 싶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들의 입에서도 끝내 절망의 신음소리가 터져 나오고 말았다. 적잖은 사람들이 영웅이 그날 밤 혹 자살이라도 하지 않을까 염려했다. 의외로 그날 밤, 그런 생각을 했던 사람들이 많았다는 것을 후에 알게 되었다. 인간에 대한 이해의 부족이라기보다 인간 양심에 대한 마지막 믿음 때문에 아마 그런 헛되고 순진한 염려를 했을 것이다. 부끄러움을 알고 책임을 질 수 있다는 것은 아무나 지닐 수 있는 능력이 아니라는 것 또한 이번 소동이 남긴 과외의 확인이었다.
‘노성일’이라는 장사꾼이 이상한 눈물을 흘리며 “줄기세포는 없다”고 폭로한 ‘그날’ 이래, 참으로 다양한 분석들이 쏟아졌다. 난치병 환자를 볼모로 삼아 희대의 사기극을 펼친 당사자는 차치하고, 그 기술을 돈으로만 환산했던 경박한 정부도 비난을 받았고, 부추긴 언론과 거기 부화뇌동한 성미 급한 국민들도 도마에 올랐다. 모두 일리 있는 이야기들이었다. ‘잘난 전문가들’도 헷갈린다는 생명공학 용어들이 대한민국 서민들의 언어생활을 지배했다.
‘황우석 보호하기’에서 ‘황우석 죽이기’로 빠르게 표변한 <조선닷컴>의 변신을 보면서 나는 그 매체가 3류임을 새삼 절감했다. 명색이 언론이라면 펼쳐오던 논지를 유지하려는 최소한의 안간힘이라도 있어야 할 텐데, 그들을 움직이는 것은 언제나 대세에 편승한 사익(社益)이라는 것을 다시금 확인할 수 있었다. ‘조선일보 이야기’는 참으로 지루한 이야기라 그만하자.
이번 사건으로 인정을 받은 몇 매체도 아쉽기는 마찬가지였다. 세상은
PD수첩, <프레시안>, <브릭>, <한겨레> 정도를 열거했다. PD수첩 패들은 지나칠 정도로 사과하긴 했지만, 취재윤리를 어겼다는 관행적 태도가 노출되고야 말았다. 역전된 인기와 관계없이 그들이 무슨 정의의 사도라고 여겨지지는 않는다. 몸에 밴 직업의식에서 끈질기게 물고 늘어져 한 건 했건만, 드센 여론에 의해 박살나기 직전에 극적으로 반전되었을 뿐이다. 가슴이 뜨거운 젊은 과학기자의 눈부신 활약으로 격려를 받은 <프레시안>의 일관된 논조는 그 기자의 한결같은 새만금 관심만큼이나 주목할 만했다. 하지만 <프레시안> 역시 가끔씩 ‘생명과학계의 발전’이라든지 ‘국익’이라는 시류적 표현을 쓸 때에는 안타까웠다. 생명과학자들의 사이트라는 <브릭>은 생명과학 자체에 대한 근원적 질문은 거두절미하고 있는 패들이라 아무리 그들이 ‘황우석 이후’의 미래를 담보하고 있다고 해도 별로 거론하고 싶지 않다. <한겨레>는 제2창간의 상징적 인물로 ’황우석’을 모델로 삼았고, 그를 담은 대형광고를 연일 지면에 내보냈다. 그런 <한겨레>의 태도는 한국사회 진보 진영의 주소와 한계를 극명하게 드러내고 있었다. “생명공학 선진국, 그게 곧 진보로 가는 길”로 믿고 있었다는 점에서는 <한겨레>나 <조선일보>나 이번 경우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한겨레>는 그나마 평형감각을 되찾았고, 바로 그 균형감각 때문에 이번 진실찾기 게임에서 초기에 잃었던 점수를 회복했다고 여겨진다. 그렇지만 이번 사태로 인해 칭찬받고 있는 어떤 매체도 생명공학 자체에 대한 비판적 질문은 찾아보기 힘들었다.
어느 날, 인터넷 매체를 통해 아래와 같은 댓글을 만났다. 아마 <프레시안>이었을 것이다. ‘ananda’라는 아이디를 쓰는 분이 2005년 12월12일 오후 9:52:11에 올린 글이다. 노성일씨의 폭로가 터지기 전이다. 그가 올린 댓글의 제목은 ‘죽이기냐 살리기냐의 문제가 아니다’였다. 아래는 ‘ananda’라는 분의 글이다.
‘이번 사건의 핵심은 난자 획득 차원의 윤리 문제를 넘어서는 더 본질적인 윤리문제가 이 사건의 핵심이다. / 45억년 대부분의 기간 동안은 생물이 없었다. 최근에 와서야 생물이 출현하고 인간이 출현한 것이다. 엄청난 시간의 과정을 걸쳐서 출현한 생명의 신비를 인간의 손으로 조작하는 끔직한 사건을 용인하는 듯한 일련의 흐름에 대해 참담함을 금할 수 없다. // 포스터의 말을 빌리자면, 배아줄기 세포 연구는 ‘사람이 손댈 수 없는 것이 있다’ 는 것에 대한 중대한 도발이다. / 사람이 손댈 수 없는 것이 있다고 하는 감각, 그 감각 속에 시간 또한 있는 것으로 시간만이 창출할 수 있는 것에 대해 우리는 존경과 경배를 나타내지 않으면 안 된다. // 황우석과 같은 류의 과학은 불경(不敬)의 첨단이다. / 황우석의 연구에 대해 뿌리부터 문제제기를 해야 한다. / 황우석 연구에 대해 거짓 진실을 익명의 전문가들에 의해 과학의 방법으로 검증하면서 배아줄기 세포 연구가 용인되는 듯한 분위기가 더 무섭다. // 핀셋으로 원초적인 생명을 유린하는 그 못된 화면을 무감각하게 지켜보고 있는 우리는 더 이상 신비적인 감각을 지니고 있는 인간이 아니다.’
ananda 같은 이의 시각은 사건이 터지기 전이나 지금이나 말할 수 없이 귀하다고 생각한다. 누구도 세밑에 한국사회가 받은 상처를 다루면서 그 환부의 뿌리에 대한 성찰까지 이르지는 못했다. 한 사회의 건강성은 ‘생명공학은 그러나 황우석을 타넘고 나아가야 한다’는 부동의 대세와 관계없이 ananda 같은 소수의 우려가 존중받을 수 있을 때 비로소 온전해질 것이다.
새해에는 다른 삶을 가꾸고, 다른 사회를 만들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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