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9.12.13 06:02
수정 : 2019.12.13 16:56
[최재천 교수의 전문가 서평]
학계 ‘간판’ 데이비드 버스가 내놓은 진화심리학 연구 ‘현주소’
진화심리학 핵심 주제 ‘짝짓기와 부모의 투자’ 무려 553쪽 다뤄
진화심리학 핸드북 1·2-전2권
데이비드 M. 버스 지음, 김한영 옮김/아카넷·12만원
진화심리학이 우리 사회에 자리매김한 과정은 지극히 예외적이다. 정식으로 진화심리학 교육 과정을 이수하고 박사학위를 취득한 학자는 경희대 후마니타스 칼리지 전중환 교수가 유일한데 재야의 고수들은 차고 넘친다. 그만큼 이 학문에 거는 대중의 기대가 남다르다는 뜻이겠지만, 제대로 걸러지지 않은 개념과 검증되지 않은 용어들이 언론과 일상 대화에 마구 불려 나와 적이 우려스럽다.
이 기이한 현상은 결코 순탄치 않았던 심리학의 자리매김과 묘한 대조를 이룬다. 현대 사회에서 심리학이 차지하는 지위와 영향력에 비해 학계 전반의 시선은 사뭇 차갑다. 하버드대에는 1933년 로웰(A. Lawrence Lowell) 전 총장이 기금을 마련해 설립된 명예교우회(Society of Fellows)가 있다. 그곳에 주니어 펠로(Junior Fellow)로 선정되면 3년 동안 하고 싶은 연구를 마음껏 할 수 있는 환경이 주어진다. 토마스 쿤, 노엄 촘스키, 재레드 다이아몬드 등이 이곳을 거쳐갔다. 그런데 지난 86년간 심리학 분야에서 선정된 펠로는 스키너를 비롯해 달랑 6명뿐이다. 인문사회 계통만 보더라도 역사학 67명, 경제학 32명, 철학 25명에 비해 빈약하기 그지없는 숫자다. 그러나 오랜 세월 학문 대접을 제대로 받지 못하던 심리학이 이제 드디어 인지심리학과 진화심리학 덕택에 ‘심리과학’으로 거듭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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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부터 <진화심리학 핸드북> 편집자 데이비드 버스, 리처드 도킨스, 스티븐 핑커, 에드워드 윌슨, 존 투비, 리다 코즈미디스, 마틴 데일리. 아카넷 제공 ※ 이미지를 누르면 크게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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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화학의 모든 분야가 그렇듯이 진화심리학의 기원도 거슬러 올라가면 결국 다윈에 이른다. ‘종의 기원’ 끝에서 세 번째 문단에 이르러 다윈은 그동안 심리학에 관해 이렇다 할 언급조차 없다가 불쑥 다음과 같이 적는다. “먼 미래에는 더욱더 중요한 연구 분야가 개척될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심리학은 점진적인 변화를 통해 정신적인 힘이나 역량이 필연적으로 획득된다는 새로운 토대에 근거해 그 기초가 세워질 것이다.” 나는 다윈이 예언한 ‘먼 미래에 개척될 중요한 연구 분야’가 바로 진화심리학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 ‘먼 미래’는 제롬 바코, 레다 코스미디스, 존 투비가 엮어낸 (적응한 마음)가 출간된 1992년에 본격적으로 열리기 시작했다. 이 책은 기존의 진화생물학과 고고인류학 발견을 새롭게 개발된 인지과학으로 버무려 인간의 본성이 종특이적으로 진화한 정보 처리 프로그램들로 구성되어 있음을 보여줬다. 이로써 드디어 인간 심리에 관한 검증 가능한 과학 연구가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인간 본성에 관한 진화적 연구의 첫 물꼬는 사회생물학이 터줬다. 하버드대 진화생물학자 에드워드 윌슨이 출간한 <사회생물학>(1975)과 <인간 본성에 대하여>(1978)가 그 효시였다. 그러나 사회생물학은 출범하자마자 페미니즘 진영과 첫 단추를 잘못 꿰면서 기득권을 옹호하는 수구 학문의 누명을 뒤집어썼다. 1978년 윌슨 교수는 미국과학진흥회(AAAS) 학술대회에서 물세례를 받기도 했다. 이런 분위기 때문에 우리는 1980년대 내내 공개적으로 스스로를 사회생물학자라고 밝히기 꺼려했다. 진화심리학은 바로 이 무렵에 태동했고 다수의 사회생물학자들이 기꺼이 진화심리학으로 전향했다. 나도 그중 하나다. 2003년 국제학술지 <진화심리학>이 창간될 때 편집진으로 초대되어 지금도 일하고 있다.
그러나 전향은 선언만으로는 부족하다. 사회생물학과 진화심리학 사이에는 엄연한 차이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현대 인간 사회의 대부분은 일부일처제 사회구조를 채택하고 있다. 하지만 포유동물의 번식 체계는 거의 어김없이 일부다처제다. 일부일처제를 유지하는 영장류로는 올빼미원숭이 한 종과 긴팔원숭이들뿐이다. 우리 인간은 사회적으로는 일부일처제로 보이지만 유전적으로도 그런지는 들여다봐야 한다. 도덕적으로는 나무랄 데 없었던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도 언젠가 성인잡지 <플레이보이>와 가진 인터뷰에서 “마음으로는 수없이 많은 간통을 저질렀다”고 고백했다. 우리의 심리와 실제로 드러나는 행동 간에는 차이가 있을 수 있다. 사회생물학이 행동의 사회적 진화를 연구하는 학문이라면, 진화심리학은 그런 행동을 유발하는 심리기제의 진화를 분석하는 학문이다.
<진화심리학 핸드북>(전 2권)을 편집한 데이비드 버스는 <진화심리학> <욕망의 진화> <이웃집 살인마> 등으로 우리 독자들에게도 친숙하다. 명실공히 진화심리학계의 ‘간판’이다. 버스는 이 책에서 시먼스, 도킨스, 핑커, 데일리, 코즈미디스, 투비 등 학계의 대가들은 물론 중진 학자들을 총동원해 인간 짝짓기 전략과 양육 투자에서 사회적 협력과 갈등, 문화와 도덕성, 그리고 사회적 평판에 이르기까지 실로 다양한 주제에 관한 진화심리학 연구의 현주소를 꼼꼼하게 보고한다.
다윈은 1859년 <종의 기원>을 통해 자연 선택(natural selection) 이론을 진화의 기본 메커니즘으로 제시했지만, 실제로 생존의 현장보다 더 극적인 진화적 변화가 일어나는 과정이 번식이다 보니 1872년 <인간의 유래>에서 제시한 성 선택(sexual selection) 이론이 인간 심리 분석에 훨씬 큰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진화심리학에서 가장 기본적이고 핵심적인 주제는 짝짓기와 부모의 투자이며 이 책에서도 무려 553쪽에 걸쳐 다룬다. 그다음으로 중요한 연구는 역시 짝짓기와 집단 생활이 빚어내는 문화의 진화이고, 이에 대한 논의 또한 223쪽에 달한다. 여러 주제의 종설(種說) 논문을 모아 놓은 이런 종류의 책은 대개 첫 장부터 끝까지 읽지 않는다. 진화심리학에 입문하는 독자들에게 짝짓기와 문화 부분부터 읽고 다른 주제들로 확장해갈 것을 권유한다.
아울러 기존의 전통적 심리학 분야들 및 인접 학문들과 진화심리학의 관계에 대해서도 구체적으로 언급하는데, 나는 이 점에 대해서 책의 머리말을 쓴 핑커의 견해에 동의한다. 2009년 4월 <다윈의 12제자들>이라는 책 집필을 위해 하버드대 심리학과에서 만난 그는 “진화심리학이 심리학의 독립된 분과학문으로 자리잡으면 실패라고 생각한다. 심리학 전반에 걸친 질문을 제기하며 모든 심리학 분야로 스며들어야 한다”고 말했다. 진화인지심리학, 진화발달심리학, 진화사회심리학 등등. 진화심리학이 심리학의 체질을 바꾸고 있다. 이 책이 확실한 출발점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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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재천 이화여대 에코과학부 석좌교수 / <다윈 지능> 저자광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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