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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성동구 마장동의 한 공장에서 프레스 작업 중 왼손 검지와 중지가 잘려 서울 성수 영동병원에 입원 중인 방글라데시 출신의 한 이주노동자. 김태형 기자 xogud555@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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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남아 놀러간 한국인 여행객들
한국서 일했던 이들로부터 봉변 일쑤
베트남서 만난 여성 “사장님 나빠요”
뉴욕서도 멕시코 불법체류자들 착취
그들이 평가하는 한국은 어떤 모습일까
포커스
2005년 말 프랑스 전역엔 검은 연기들이 치솟았다. 거리의 자동차들을 불 지르고 폭동을 일으킨 사람들은 ‘방리유’라는 이름의 빈민지역에 사는 이슬람계 이주민 2-3세대 젊은이들. 그들은 오래 쌓여온 박탈감과 소외감을 폭동으로 불살랐다. 급기야 프랑스 경찰은 1959년 비상사태법에 따른 야간통금 및 집회금지조치를 내려야 했다.
새해 들어 간신히 불길이 잡힌 프랑스 폭동이 우리 한국에게는 그저 강 건너 불일까. 한국에 머무는 35만(일설에는 50만) 외국인 이주노동자들은 힘들고 위험해 일반적으로 한국인들이 피하는 이른바 3D 업종의 역군들이다.
그들은 법으로 정한 최저임금인 시간당 3,150원을 받으며 하루 12시간씩 일하기 일쑤다. 그런데도 악덕업주를 만나 노동의 대가를 떼이거나 몸이 다쳤는데도 보상은커녕 치료조차 못 받고 고국으로 쓸쓸히 돌아가는 사람들이 많다. 그렇다면, 밀린 임금 달라고 요구하는 데 지쳐, 인간의 존엄성을 보장하라고 외치는데 지쳐, 좌절감에 빠진 외국인 노동자들이 이판사판식으로 프랑스에서처럼 폭동을 일으키지 않으리란 법도 없다.
필자의 개인적 체험에 바탕을 두고 말한다면, 지구촌 사람들이 한국을 보는 눈길은 그리 다정하지 못하다. 지난 2002년 지구촌 분쟁지역 가운데 오랫동안 질질 끄는 이른바 ‘저강도 분쟁’으로 많은 사상자를 낳아온 카슈미르에 갔을 때의 얘기 하나.
그곳에서 우연히 택시 운전사 무하마드 가흐산(27)을 만났다. 그는 “3년 전 한국 인천과 시흥에서 산업기술 연수생으로 일한 적이 있다”고 더듬거리는 영어로 말했다(파키스탄의 공용어는 우르드어와 영어다. 국가교육기관의 문턱을 제대로 밟아보지 못한 대부분의 카슈미르 산골 사람들은 영어를 쓰지 않는다). 일을 마치고 늦은 저녁 호텔로 돌아가는 길에 그런 얘길 듣는 순간 슬며시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왜 불안했냐고? 한국인 여행객이 동남아에 놀러 갔다가 전에 한국에서 노동자로 일했던 사람들로부터 봉변을 당한다는 얘기를 이미 여러 차례 들은 때문이었다. “이 XXX!” 하며 거친 한국말로 모진 욕을 하고 돌아서면 그나마 다행! 주먹으로 얼굴을 얻어맞고 발길로 채여, 온몸이 멍든 채 인천공항에 내리는 여행자조차 생겨난다. 동남아 현지인들이 입에서 토해내는 거친 우리말 욕들은 그들이 지난날 언젠가 몸담았던 한국의 공장에서 바로 우리 한국인 간부들로부터 온몸으로 당하며 배운 것임에 틀림없다.
파키스탄 청년의 꾹 다문 입
다행히도 가흐산은 품성이 착한 카슈미르 청년이었다. 사람 좋아 보이는 잔잔한 미소와 큰 눈망울을 지녔다. 그렇지만 한국에 대한 인상이 좋았냐고 묻자, 대답하길 꺼렸다. 다음날 아침 9시 호텔 앞에서 만나 하루 종일 같이 다닌 뒤 저녁을 함께 먹으며, 하루 종일 마음에 담아두었던 질문을 다시 꺼냈다. 한국에 대한 인상이 좋았냐고. 가흐산은 또 머뭇거렸다. 대답을 다그쳤다. 그랬더니, “솔직히 말해 좋지 않다. 생각하고 싶지 않다”는 말뿐, 곧장 입을 닫았다.
가흐산이 그토록 말을 아끼도록 만든 한국. 그의 머리 속에 그려진 한국의 이미지는 결코 긍정적인 것이 아닐 것이다. 그리운 한국, 다시 가고픈 한국이 아닌, 잊고 싶은 한국이란 음울한 이미지일 게 뻔하다. 우리들 가운데 누가 가흐산의 한국 이미지에 먹칠했을까.
또 다른 얘기 한토막. 베트남에 파병된 한국군의 발자취를 더듬기 위해 몇해 전 베트남에 갔을 때의 일이다. 한국군 백마부대 주둔지였던 나트랑에서 30대 초반의 여인 구에를 만났다. 그녀에 딸린 일곱 식구를 먹여 살리는 생존기법은 발 마사지. 나트랑 해변에서 행락객들을 상대로 1시간씩 발 마사지를 해주고 우리 돈으로 5천원쯤 받는다.
“안녕하세요”라고 한국말도 조금 할줄 아는 구에의 마음속에 새겨진 한국의 추억은 악몽 그 자체. 한국인이 낀 인력송출업체는 그녀에게 “한국 가면 큰 돈벌 수 있다”고 속삭였다. 그 말만 믿고 안양의 작은 봉제업체에서 하루 12시간씩은 보통으로 일했다. 그러나 끝내는 몸과 마음의 병을 얻은 채 베트남행 비행기에 올랐다. 그녀는 “사장님 나빠요”란 말을 되풀이 했다. 베트남은 성적으로 매우 보수적인 사회다. 한국인 사장은 그녀를 집적거렸고, 임금도 제때 주지 않다가 어느 날 부도를 내고는 도망쳤다.
한국에 대한 외국인 노동자들의 이미지는 필자가 바로 얼마 전까지 8년을 보낸 뉴욕에서도 엉망이다. 뉴욕의 한국인들이 많이 손대는 사업 가운데 하나가 봉제업이다. 다 그럴 리야 절대 없다고 믿고 싶지만, 일부 한국인 봉제업자들은 이제 겨우 스무 살이 될까 말까한 멕시코 여공들을 헐값에 착취하면서 수지타산을 맞춘다.
그 처녀들은 대부분 미-멕시코 국경을 몰래 넘어 들어온 이른바 불법체류 신분. 한국인 업주들은 여공들의 그런 약점을 잡고 최저임금(2006년 1월 기준 6.75 달러)에 턱 없이 못 미치는 저임금으로 혹사시킨다. 여공들이 하루 종일 들어 귀에 익은 한국어는 ‘빨리 빨리!’와 ‘일 해!’다.
2003년 겨울, 미국인 친구와 더불어 미 공영 TV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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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명/국제분쟁전문가, 국민대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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