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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경식/도쿄경제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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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6년 고교생 때 배타고 첫 고국행
친척들에게 줄 시계선물을 감췄더랬다
조국은 상처투성이요 가난했다
올봄 교환교수로 두번째 고국행
상처는 치유된 걸까?
눈을 똑바로 뜨고 살펴볼 작정이다
심야통신/머나먼 조국
나는 예전에 밀수행위를 한 적이 있다. 지금 새삼스레 관헌(당국)이 문제삼을 일은 아닐 것이라 생각해서 여기에 고백해 두고자 한다.
1966년 여름, 고등학교 1학년생이었던 나는 처음으로 한국에 왔다. 재일 한국거류민단이 한국정부와 제휴해서 실시한 교포학생 하계학교라는 행사였는데, 대학생이었던 둘째 형과 함께 참가했던 것이다. 우리 단체는 시모노세키로 가는 야간열차에 몸을 실었다. 거기서 부산으로 가는 배를 탈 예정이었다. 대학생들은 술을 마시고 어울려 이야기를 나눴고, 흥분한 탓인지 한 숨도 자지 않은 이가 많았다. 내 형은 그럴 때 언제나 떠들썩한 무리의 중심에 있었다.
밤이 새고 시모노세키 도착 시간이 가까와질 무렵 형이 나를 자기 곁으로 불러 5, 6개의 손목시계를 건네주면서 말했다.
“이거, 적당히 감춰 둬. 세관에서 적발당하면 세금을 물어야될지도 몰라. 신발 속이나 팬티 속, 어디든 괜찮아. 너는 아직 어리니까 세관 직원도 경계하지 않을거야. 그리고 설사 발각당하더라도 내가 잘 얘기해줄 테니까.”
나는 당혹했다. 세금은 얼마나 될까? 발각당하면 어떤 죄를 받게 될까? 어떻게든 난처한 처지를 피해가고 싶었으나 형한테서 겁쟁이라는 얘기를 들을까봐 마지못해 손목시계를 받았다. 처음 고향을 방문하는지라 친척들을 만날 것이고, 그때 건네줄 선물이 필요하다. 친척들은 모두 가난하다. 그러나 이쪽도 값비싼 선물을 구색을 갖춰 살만큼 풍족한 처지는 못된다. 게다가 무겁거나 큰 것은 운반하기가 쉽지 않다. 그런 계산 끝에 지혜를 짜낸 결과 중고 손목시계를 사모았던 것이다. 야간열차 화장실에 숨어서 양쪽 발에 신고 있던 양말 속에 손목시계를 감췄다. 마약이라도 숨기고 있는 듯한 기분이었다.
시모노세키 항에 도착하자 아리랑호라는 낡은 배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출항까지의 시간을 대합실에서 보냈다. 그런데 1시간 정도 지나 마침내 출항 시간이 됐을 때 형이 보이지 않았다. 승객들은 차례로 열을 지어 세관 검사대를 통과하기 시작했다. 나도 하는 수 없이 열 가운데 섰지만 심장이 마구 방망이질을 해댔다. 만약 손목시계를 숨긴 사실이 들통나면 어떡하지? “그때는 내가 어떻게든 해 줄께”라고 안심시키던 형은 중요한 순간에 보이지 않았다.
내 차례가 됐으나 뒤에 서 있던 사람이 먼저 하도록 양보하고 형이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그런 태도는 몹시 부자연스러워 세관원이 이상하게 볼 게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마침내 출항을 알리는 뱃고동 소리가 울렸는데도 형은 아직 나타나지 않았다. 빨리 타라고 재촉하는 직원에게 부탁하고 나는 형을 찾으러 나섰다. 대합실 근처 작은 방에서 스토브가 따끈하게 타오르고 있었다. 형은 그 옆 벤치에 사지를 펴고 큰 대자를 그리며 드러누워 자고 있었다. 두들겨 깨우자 형은 두 눈을 비비며 신발을 아무렇게나 걸쳐 신고는 나보다 먼저 세관쪽으로 잽싸게 빠져나가버렸다. 뒤에 남겨진 나는 각오를 다지며 인생 최초의 밀수행위를 결행했던 것이다. 그토록 걱정했는데 세관원은 아무 조사도 하지 않고 기껏 “빨리 타”라고만 했다.
드디어 배를 탄 나에게 형이 꾸짖듯이 말했다. “뭘 꾸물대고 있어. 늦었잖아!” 화가 치민 나머지 대꾸할 말조차 잊어버린 내가 이윽고 “그렇지만 시계가…”라고 겨우 한마디 하자, 형은 무슨 뜬금없는 얘기냐는 듯 말했다. “시계? 시계라니 무슨 소리야?” 동생에게 밀수행위를 시켜놓고는 그것을 홀라당 까먹고 있었던 것이다.
어두운 밤 현해탄(대한해협) 위에서 아리랑호는 출렁거리고 있었다. 엔진의 중유 냄새가 진하게 났다. 계속 수면부족에 시달리던 대학생들은 심한 배멀미를 앓으며 여기저기서 궤에궤에 게워내고 있었으나, 유독 형만은 생기발랄하게 큰 소리로 계속 떠들어댔다. 긴 밤을 새고 날이 밝자 부산항이 눈 앞에 있었다. 갑판에 나가 바라보니 산 위에까지 이어진 판잣집들이 아침 햇살에 반짝이고 있었다.
그렇게 해서 나는 태어나 처음으로 조국 땅을 밟았던 것이다. 충청남도 출신인 할아버지가 이 부산항에서 일본으로 건너간 것이 1928년이었으니 그로부터 약 40년이 지난 셈이다. 대학 기숙사에 머물며 우리말 교육과 반공교육을 받았다. 휴전선 견학 여행도 했다. 조국은 상처투성이요 가난했다. 구걸하는 소녀나 껌팔이 소년이 별로 나이 차도 나지 않는 내게까지 엉겨붙어 떨어지지 않았다. 그들은 바로 나 자신이었다. 그렇게 생각했다. 해방 뒤 우리 아버지가 일본에 남지 않고 조국에 돌아갔다면 내가 이 아이들처럼 구걸하고 껌팔이를 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들이야말로 내 동포였던 것이다. 조국은 내게 마음편한 곳은 아니었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이 땅이야말로 내가 살아야 할 장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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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로부터 3년 뒤 형은 모국 유학생으로 서울대 대학원에 진학했고, 그 2년 뒤인 1971년 또 한 사람의 형과 함께 ‘학원침투 간첩단’ 사건에 연루돼 구속됐다. 도쿄의 사립대학에 다니고 있던 나는 졸업 뒤엔 형들처럼 모국에 유학할 작정이었으나 그것은 불가능해졌다. 형들 중 한 사람은 17년, 또 한 사람은 19년이나 감방살이를 한 뒤 출옥했다. 그때 나는 이미 나이 40이 돼 있었다.
지금 나는 이 글을 서울의 한 숙소에서 쓰고 있다. 올 4월부터 서울 시내에 있는 한 대학 객원연구원으로 와 있기로 했고 그 준비를 위해 왔다. 지금까지 단기 여행차 여러번 방문했지만 올해부터는 처음으로 조국 땅에서 제법 오래 생활을 해보게 된 것이다. 돌이켜 보면 첫 조국 방문 때 15살이었던 나는 지금 55살이 됐다. 40년이라는 세월이 흐른 것이다.
가난하고 상처투성이였던 조국. 그 가난은 이미 지나가버린 걸까? 그 상처는 치유된 걸까? 처음 생활하는 조국 땅에서 나는 눈을 똑바로 뜨고 그것을 살펴볼 작정이다.
번역 한승동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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