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주요메뉴 바로가기

본문

광고

광고

기사본문

등록 : 2006.01.05 18:44 수정 : 2006.01.06 15:47

양정언/공안과 전문의

미국은 너무 건강하고 낙천적이라 좋다는 시절에 그는 하필 떠났나
미국이 잃어버린 송어를 낚으러?

나는 이렇게 읽었다/리처드 브라우티건 <미국의 송어낚시>

이 책에 대해서 뭐라 말하는 것은 아마 사족일 것이다. 편안하게 소파에 앉아 아무데나 펼쳐서 차근차근 읽으시라. 그곳에는 난해한 개념이나 독자를 가르치려는 작가의 욕망 같은 것은 찾아볼 수 없다. 불과 몇 문단으로 이루어진 짧은 글들은 무지개 송어처럼 꿈틀대면서 손에 잡혔다가 곧 미끄러져 나간다. 우리가 성인이 되면서 잃어버린 모든 것들이 그곳에 그대로 남아있다. 이 책에 나오는 인물들은 <어린 왕자>의 사막여우같이 한두 가지의 교훈을 전하려 하거나 <루바이야트>의 늙은 현자처럼 당신을 달콤한 허무로 초대하지 않는다. 그가 현대문명의 위기를 그렸다거나 환경생태문학의 선구자라거나 하는 얘기도 그냥 거창하게만 들린다. 그는 몇 가지 자신이 알고 있는 이야기를 나지막이 들려줄 뿐이다.

책 앞표지에는 멋진 흑백사진이 있다. 샌프란시스코 워싱턴 광장에 있는 벤저민 프랭클린의 입상 앞에 청바지를 입은 작가가 서 있고 한 여인이 앉아 있다. 책의 첫 글이 표지사진에 대한 얘기인 데 마지막 두 문장은 이렇다. “벤저민 프랭클린의 자서전을 읽고 미국에 대해 알게 되었다고 한 게 카프카였던가…‘나는 미국인들이 건전하고 낙천적이어서 좋아’라고 말한 카프카.” 카프카의 말은 왠지 슬프게 들린다.

그의 글에서 엄마가 일하러 나갈 때 침대에 묶여있던 유년기의 추억이나 아버지의 부재라는 프로이트적 외상의 흔적을 찾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러려면 라깡조차 지적인 서커스를 벌여야 할 것이다.) 대신 작가는 마을 밖 멀리 하얗게 보이는 개천에 낚싯대를 들고 찾아갔더니 나무들에 둘러싸인 집으로 올라가는 하얀 나무계단이었다거나 포도맛 쿨에이드 가루 한 봉지를 물에 녹여 아주 묽게 4 갤런의 쿨에이드 음료를 만들던 어린 시절의 가난한 친구에 대해 이야기한다. 혹은 워스윅 노천온천에서 여자 친구와 물속에서 정사를 나눈 후 수면 위에 거품같이 떠오른 그의 정액으로 미끄러져 들어오던 죽은 물고기와 미국의 송어낚시 호텔 208호에 사는 이름이 208호인 고양이에 대해 이야기한다.

샌프란시스코의 길거리에서 자신이 쓴 시를 행인들에게 나누어주던 작가의 활동기는 비트세대와 히피세대에 걸쳐 있다. 그러나 그는 당대 문학의 중심에서 약간 비켜 서 있다. 이 소설의 성공이후 작가는 서서히 잊혀져갔다. 비평가들은 브라우티건의 나이브한 글보다는 나보코프의 미로와 필립 로스의 수다를 더 좋아했다. 몇 권의 책을 써서 이 작가들을 비판하거나 찬미하거나 혹은 경멸하는 것도 가능하지만 브라우티건의 글에 대해서는 사실 별로 할 말이 없는 것이다.

그는 1984년 49살의 나이에 자살했다. 얼굴이 날아간 그의 시신은 몇 주가 지나서야 발견되었다. 그의 몸 옆에는 술병과 44구경 총이 놓여 있었다. 집의 벽과 문, 천장에는 수백 개의 총알구멍이 나 있었다. 그때 미국의 대통령은 레이건이었다. 카프카의 말처럼 미국인은 너무 건전하고 낙천적이었다. 남들이 다 좋다는 시절에 그는 미국이 잃어버린 송어를 낚으러 일찍 떠났다.

이 책의 번역본은 1987년 한 문예지의 부록으로 처음 나왔다. 서울대 김성곤 교수의 번역은 훌륭하다. 주변에 책을 좋아하는 친구가 있다면 절대 이 초판본을 그에게 보여주지 말아야 할 것이다. 절판되어서 중고서점에서도 찾기 힘든 이 책은 어떤 사람들에게는 참을 수 없는 유혹이기 때문이다.



광고

관련정보

브랜드 링크

멀티미디어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한겨레 소개 및 약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