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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정일/경희대 교수·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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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이 낙원이 되길 바라진 않지만
지옥을 임대한 곳이 돼선 안 된다
한국인이 천사처럼 살 필요는 없지만
짐승처럼 살기는 거부해야 한다
비판적 상상력을 위하여
신년 결심은 사흘을 넘기기 어려울만치 단명하다. ‘새해에는 술이여 안녕’ 혹은 ‘담배 그만’이라고 머리에 재를 뿌리며 다짐한 사람들의 결심은 하루 만에 무너지거나 그 이행이 무한 연기된다. 결심의 주인을 곧잘 배반하는 것도 그 신년 결심이라는 것의 이상한 버릇이다. ‘모든 일을 정확히’라는 결심을 세우고 새해 아침 동해의 떠오르는 해를 보기 위해 달려간 사람이 엉뚱한 열차를 타는 바람에 정확히 서쪽으로 내달렸다는 식의 착오가 말하자면 결심의 배반이다. 그러나 이런 단명성과 배반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새해 결심 세우기를 중단하지 않는다. 자기 갱신의 의식 같은 것이 신년 결심이기 때문이다.
새해 첫날에 세워보는 결심은 성찰, 다짐, 소망이라는 세 가지 요소를 담고 있다는 점에서 특별하다. 작년 한 해 손전화를 여섯 번 잃어버리고 여섯 번 되찾은 한 아가씨의 2006년 신년 결심은 “손전화를 챙겨라, 언제나”이다. 시인 아무개 씨의 신년 작심은 “졸지 말자”다. 구랍 어느 날, 그는 집으로 가기 위해 의정부행 전철을 타긴 했으나 술기운에 졸고 졸다가 열차가 의정부를 돌아 새벽 1시 반대편 종착역 오이도에 도착해서야 강제 하차를 당한 경험을 갖고 있다. 지난해의 실수에 대한 반성, 황당한 실수는 반복하지 말자는 다짐, 다짐의 순탄한 이행을 바라는 소망, 이런 것을 자기 갱신에 연결시키는 일이 아니라면 신년 결심이라 해서 특별할 것이 없다.
사람들의 신년 결심에 담긴 사연들은 소소하면서 의미 있는 인류학적 자료이기도 하다. 손전화를 챙기자는 결심은 21세기 초 한국인의 일상에서 그 손전화라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녀석이었는가를 증언한다. 손전화를 여섯 번 잃고 여섯 번 되찾을 수 있었다는 것은 주은 손전화 주인 찾아주기에 관한 한 한국인이 무척 정직했다는 사회학적 증거이거나 분실 기기를 ‘위치추적’으로 찾아내는 기술이 2005년의 한국에는 이미 일상화되어 있었다는 소리다. 2005년 한 해 엉뚱한 귀가 전철을 탄 한국인은 얼마이며 술에 취해서, 혹은 피로에 절어서, 무한히 졸다가 내릴 곳 놓치고 오이도로 어디로 빙빙 돈 ‘서울의 오디세우스’는 몇 명일까? 사회학도라면 관심을 가질만한 일상의 사회학이 거기 있다. 신문들도 2006년 한국인들의 신년 결심을 취재 보도할 만하다. 그 구구한 결심의 사연들에는 이 시대를 살아가는 한국인의 불안과 희망, 눈물과 웃음이 담겨 있을 것이므로.
집단의 삶에 대한 기원을 담을 수 있다는 것도 정초 소망세우기의 매력이다. 신년 결심이 주로 개인들의 사적 삶에 관한 것이라면 신년의 기원 속에는 ‘우리’의 삶을 갱신하려는 집단적 소망이 담긴다. 집단적 소망이 없는 사회는 표류하는 배처럼 위험하고 공허하다. 한 배를 탄 사람들은 적어도 그 배를 어디로 어떻게 몰고 갈 것인가에 대한 합의와 약속을 가져야 한다. 개인들의 소망이 갈래갈래 찢어진 시대일수록 그 각각의 소망들이 존중되고 이루어질 수 있게 할 공통의 마당과 공통의 규칙, 그리고 규칙 준수의 약속이 필요하다. 우리가 2006년의 대한민국을 위한 어떤 집단적 소망을 표현해볼 수 있을까? 투표해보지도 않고?
투표해보지 않아도 한국에 5년 이상 살아본 사람이라면 2006년 한국인의 집단적 소망이 무엇인지 안다. 그 소망의 목록 첫머리에 올라 있는 것들은 1) 취업과 고용안정, 2) 빈부 양극화의 해소, 3) 사람을 생각하는 사회 만들기다. 이것들은 낙원의 소망이기보다는 사람이 사람답게 사람으로 살 수 있는 사회를 향한 열망이다. 그런데 자세히 들여다보면 볼수록 1, 2, 3번 꿈의 어느 것도 한 나라의 힘만으로 이루어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취업과 고용의 불안, 양극화의 심화는 세계시장체제에 편입된 나라들의 공통 현상이고 세계화 열차를 탄 나라들이 앓고 있는 난치병이다. 우리는 세계화의 열차를 정지시킬 재간이 없고 거기서 뛰어내릴 재주도 없다. 그러나 혼자 풀기 어려운 문제이면서도 그걸 풀기 위해 힘과 재주를 모으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 세계화 시대 단위 국가와 사회공동체들의 운명이며 시장체제 자체의 책임이다.
새해에는 우리의 시장 세력과 기업들이 제발 시장유일주의 논리와 자본주의의 초보 논리를 경전 외듯 되뇌는 일은 그만 두어주었으면 싶다. 한국 자본주의가 신년에 깨치고 실현해나가야 할 가장 시급한 과제는 자본주의에 인간의 얼굴을 달아주는 일이다. 한국판 시장유일주의는 시장논리에 의한 사회경영만이 사회 전체의 목표인 것처럼 시장체제를 낙원화하고 시장논리를 복음화하는 오만에 빠져 있고 기업들은 이윤유일주의의 포로가 되어 있다. 물론 기업은 이윤을 내야 한다. 그러나 시장이 사회의 목적이 아니듯이 이윤도 어떤 다른 목적을 위한 수단이지 그 자체로 목적이 아니다. 그 ‘다른 목적’은 아주 간단하게도 ‘사람이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사회’의 실현이다. 이 목적을 빼고 나면 무엇이 이윤창출을 정당화할 것인가? 21세기 기업의 모델은 달라져야 한다. 그 새로운 모델을 향한 전환의 첫걸음은 기업이 수단과 목적의 혼동을 정지하고 자본주의에 인간의 얼굴을 갖게 하는 데서 시작된다.
자본주의는 반드시 냉혹하지 않아도 된다. 자본주의가 사람들의 미움을 사지 않을 방법은 인간의 체온을 가진 자본주의 만드는 것이다. 그 자본주의에서 기업이 선택해야 할 방향은 자본, 주주, 투자자들의 최대 이익만을 챙기는 일이 아니라 최소한 여섯 가지 가치들을 함께 고려하는 쪽으로의 ‘패러다임 전환’이다. 고객, 피고용자, 투자자, 하청업체와 대리점, 사회공동체, 환경이 그 여섯 가지 가치다. 이 방향으로의 전환을 모색하고 실천하는 기업들이 우리 사회에 여럿 등장하고 있다는 것은 반가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우리는 2006년의 대한민국이 꼭 낙원이나 천당 같은 곳이 되기를 바라지 않는다. 그러나 대한민국이 지옥을 임대한 곳처럼 되어서도 안 된다. 일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일할 곳을 얻어 삶을 안정된 궤도에 올려놓고자 하는 것은 낙원 지향이기보다는 사람처럼 살고 싶은 사람들의 소박한 꿈이다. 파스칼의 말처럼 인간은 천사도 짐승도 아니다. 한국인의 집단적 신년 소망은 천사처럼 살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사막의 불안한 짐승처럼 살기를 거부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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