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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6.01.05 19:56 수정 : 2006.01.06 15:50

근대 외과학의 어버이로 추앙받는 앙브루이즈 파레가 살던 당시에 쓰이던 수술도구들을 그린 그림. 이발사 외과의사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외과의로 명성을 쌓으며 새로운 외과 기구와 기재를 개발하기도 했다.

근대 외과의학 어버이 파레
끓는 기름 대신 연고로 총상 치료
전통적 견해 맹종 않고 경험·관찰 중시
외과에 과학적 요소 도입한 헌터
실험 위해 자기 몸에 성병 고름 넣기도


의학속 사상/⑫ 외과의 근대화 : 파레와 헌터

오늘날과 달리 ‘별볼일 없는’ 분야였던 외과는 르네상스 무렵부터 본격적으로 발전하기 시작했고 그에 따라 외과의사의 위신도 점차 높아졌다. 근대 초까지도 외과의사들은 대개 이발사를 겸해서 이발사-외과의사로 불렸으며 그 지위가 미천했던 바 자신들의 사회적 위상을 높이려는 적극적인 노력도 외과의 발전에 한몫했을 것이다. 그리고 이때 부흥하기 시작한 인체해부학이 외과술의 발달에 어느 정도 도움을 주기도 했다. 당시까지 내과든 외과든 고대로부터의 문헌이나 경험에 주로 의존했다.

내과 분야에서도 새로운 질병이 생겨나는 등 기존의 의학 지식과 기술로는 해결할 수 없는 문제가 발생했지만 외과 영역에서는 그러한 경향이 더욱 뚜렷했다. 그러한 시대적 배경에서 뛰어난 외과의사들이 많이 배출됐는데 그 가운데에서도 오늘날까지 근대 외과학의 어버이로 추앙받는 사람이 앙브로아즈 파레(Ambroise Pare, 1510~1590년)다.

이발사외과의사의 아들로 프랑스의 시골 마을에서 태어난 파레는 고향에서 외과 수련을 받은 뒤 파리의 오텔 디외 병원에서 외상치료를 담당하다 1537년 군의관이 되어 20년 가까이 전쟁터에서 살게 됐는데 그때부터 명성을 날리게 됐다.

그가 살던 당시에는 크고 작은 전쟁이 매우 많았다. 그 덕택(?)에 파레는 외과에 대한 실습과 연구를 많이 할 수 있었다. 당시에 총상 환자에 대해서는 즉시 끓는 기름으로 환부를 지지는 치료법(소작법)을 썼다. 즉 다 비고(1460~1525년)는 <외과술의 실례>에서 “총상에는 독이 있기 때문에 불로 치료해야 한다”라는 유사 히포크라테스 교의에 의해 우선 끓는 기름으로 지져야 한다고 했으며 그것은 널리 받아들여졌다. 그러나 소작법은 치료 뒤에 환부가 퉁퉁 부어오르는 경우가 많았고 통증도 심했으며 종종 대단히 위험하기도 했다. 어느날 사용하던 기름이 바닥이 나자 파레는 할 수 없이 새로운 방법을 사용하게 됐다. 그는 뒷날 당시의 일에 대해 <화기(火氣)에 의해 생긴 상처의 치료법>(그는 당대의 학문 언어인 라틴어를 몰랐으므로 프랑스어로 썼다)에서 다음과 같이 기술했다.

“어느날 밤 많은 부상병을 치료하다보니 끓는 기름이 다 떨어졌다. 할 수 없이 나는 총상 부위에 연고를 발라 상처를 씻고는 붕대로 감아놓았다. 그리고는 그날 밤 쉬이 잠을 이룰 수 없었다. 끓는 기름으로 상처를 지지지 않아서 부상병들이 죽거나 독으로 오염되지 않을까 걱정이 됐기 때문이다. 다음날 새벽 일찍 환자들을 돌아보니 내 걱정과는 전혀 달리 그들은 별로 통증을 호소하지도 않았고 상처도 거의 부어 오르지 않았다. 보통 때와 같이 끓는 기름으로 지진 환자들은 열이 심했고 통증도 대단했으며 상처 부위도 많이 부어 올라 있었다. 그때 나는 총상에 다시는 소작법을 쓰지 않기로 작심했다.”


인조 팔다리·인조 코도 고안

파레의 명성이 점차 높아짐에 따라 이 이야기는 유명해져서 끓는 기름은 더 이상 총상 치료에 쓰이지 않게 됐다. 파레는 자신의 경험을 종합해 파리대학 교수인 실비우스의 도움으로 1545년 총상에 관한 책을 출간했다. 그리고 파레는 지혈 방법으로도 중세 시대 동안 써 오던 소작법 대신 고대의 결찰법(잡아매기)을 부활시켰다. 그밖에 인조 팔다리, 인조 코를 고안했으며 새로운 외과 기구와 기재를 개발하기도 했다. 파레는 1561년 외과 역사상의 명저 <보편 외과학>을 펴내어 그러한 진료 경험과 연구 결과들을 종합했다.

외과에 과학적 요소를 도입한 존 헌터 초상화.
1554년 앙리 2세는 파레의 낮은 교육과 신분에도 그를 왕실 외과장에 임명했다. 그 뒤 성 코스메 의학교의 콧대 높은 교수진도 파레를 교수로 임명했다. 르네상스 시대에 비천한 이발사외과의사가 사회적, 학문적으로 높은 지위에 이르게 된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꾸준한 노력, 연구심, 강인한 성격, 천부적 재능 등이 파레로 하여금 신분을 뛰어넘도록 했다. 다른 선구자들과 마찬가지로 파레 역시 전통적인 견해에 맹종하지 않고 자신의 경험과 관찰에 의존함으로써 새로운 치료법을 발견했을 뿐 아니라 그러한 정신과 방법의 힘을 보였던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파레의 다음과 같은 말에서 그의 사람됨을 능히 짐작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바람직한 의사의 자세를 배우게 된다.

“나는 환자들에게 붕대를 감아 주었을 뿐, 치료는 신의 몫이다.” 이것은 “드넓은 바다 앞에서 조약돌 한 개를 손에 쥔 소년일 뿐”이라는 뉴턴의 말과 함께 과학과 의학을 공부하는 젊은이들에게 가장 먼저 들려 주고 싶은 말이다.

외과의 근대화에서 결코 빠뜨릴 수 없는 사람이 존 헌터(John Hunter, 1728~1793년)다. 종두술의 발견자인 제너의 스승이고, 비뇨기과적 문제로 고통받던 저 유명한 벤저민 프랭클린의 주치의이기도 했던 존 헌터는 외과수술 기법에서도 뛰어났지만, 그를 역사상 가장 위대한 외과의사들의 반열에 올려놓은 것은 외과에 과학적 요소를 체계적으로 도입했다는 사실이다. 어떤 의학사가는 클로드 베르나르가 19세기에 가장 위대한 실험생리학자이듯이 존 헌터는 18세기의 독보적인 실험외과의학자라고 예찬한다.

스코틀랜드의 글래스고 출신인 그는 1748년 런던으로 옮겨와 우선 해부학 공부에 몰두했다. 밤낮 없이 해부에 열중하던 헌터는 타고난 솜씨와 열정적 기질 덕분에 곧 인체해부에 익숙해져 고향을 떠나온 지 한 해 만에 런던에서 해부실습 강사 자리를 차지하게 됐다.

1751년부터 성 바톨로뮤 병원에서 포트의 지도로 외과 수업을 시작한 헌터는 3년 뒤에 성 조지 병원으로 일자리를 옮겨 그곳에서 25년 동안이나 봉직했다. 헌터는 군 복무로 몇달 동안 옥스퍼드에 체류한 것을 제외하고는 생애를 마칠 때까지 런던에 머물렀다. 외과의사로서 명성을 얻은 뒤로는 런던이 그를 놓아주지 않았던 것이다.

실험 위해 집안 동물원 설치

헌터는 정맥류 환자에서 동맥을 결찰하는 데 성공하는 등 새로운 수술 기법을 많이 시도하고 개발하는 한편 많은 종류의 동물실험을 지치지 않고 계속했다. 그는 동물실험을 위해 런던 교외에 있는 자신의 집에 동물원을 차려 놓기까지 하는 등 매우 열성적이었다.

존 헌터가 지금도 칭송받는 것은 외과의사로서 그러한 실험을 꾸준히 시행함으로써 주먹구구식이나 체험에 의존하는 성격이 여전히 농후하던 외과를 과학적 특성을 가진 전문 분야로 발전시키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했기 때문이다. 헌터는 또한 일찍이 자료의 중요성에 눈떠 그 보관에도 관심이 깊어 해부표본과 생물표본을 많이 모았는데 그것들은 ‘영국 왕립외과의사협회 헌터 기념 박물관’을 세우는 데 토대가 되었다. 한동안 ‘세기적 연구’라고 떠들썩했던 어느 실험실에 제대로 된 실험노트조차 없다는 사실을 알고 외국의 동료 연구자는 기가 막혀 눈물을 흘렸다지만, 헌터는 “그건 과학이 아니야”라고 개탄했을 것이다.

헌터는 자신의 몸에 성병 환자의 고름을 주입하는 실험을 하기도 했다.(하지만 조수들에게 그런 실험을 했다는 기록은 없다) 기록된 증세로 미뤄 보아 그는 매독과 임질 두 가지에 감염됐던 것 같다. 그는 자신의 몸에 생긴 증상과 징후들을 자세히 관찰해 기록에 남겼는 바, 병의 경과를 명료하게 보기 위해 당시에 유행하던 수은 요법이었을 것으로 생각되는 치료를 일부러 늦추기까지 했다. 그 시대에는 매독과 임질을 분간하지 못했는데 위험을 무릅쓴 헌터의 그러한 자가실험을 통해서도 그 두 가지 질병을 구별하지는 못했다.

황상익/서울대 교수·의사학
당시 손재주가 뛰어난 외과의사들이 많았고 머리, 목, 가슴, 뱃속의 구조에 관한 해부학 지식도 많이 축적됐지만 외과 수술은 여전히 몇 가지 예외를 제외하고는 몸의 표면에 머물렀다. 몸 속 깊숙이 외과의사의 수술칼이 들어가기 위해서는 마취술이 개발되는 19세기 중엽을 기다려야 했다.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기 위한 준비는 많은 사람들의 손과 머리와 가슴에 의해 꾸준히 마련됐는데, 그 가운데에서도 헌터의 공은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다. 헌터는 다음과 같은 경구로 자신과 타인들을 다독이면서 좀더 나은 앞날을 대비하고 있었다.

“생각에만 머물지 말지어다. 인내심을 가지고 실제로 행해라. 그리고 더 정확해지도록 부단히 노력하라.” hwangsi@sn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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