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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6.01.12 16:25 수정 : 2006.01.13 16:44

김찬호/한양대 강의교수·문화인류학과

입구 들어서면 귀금속 매장
‘력서리’ 분위기 젖어 소비모드로
고객 감동의 프러포즈 범람
창문과 시계 없는 공간
세상과 시간 잊고 쇼핑 탐닉

생활 속의 문화사회학

“사람들은 쇼핑 이야기가 나오면 의외로 약간 불법적인 일을 하다 들킨 것처럼 어색해 한다. 마치 혼외정사 이야기가 나왔을 때처럼 말이다. 하지만 어떤 의미에서 그건 놀랄 일도 아니다. 쇼핑은 욕망의 탐구이면서 동시에 책임의 완수이기도 하다. 그것은 죄책감과 자부심을 함께 이끌어내고, 부담이 되면서도 기쁨을 주는 양면성을 갖는다. 또한 애써 감추고자 하는 우리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준다.” (토머스 하인 [쇼핑의 유혹] 중에서)

아이들은 자라나면서 자아가 형성되어갈 무렵 엄마에게 뭔가를 사달라고 조르며 떼를 쓰기 시작한다. 물건을 구매할 수 있다는 것은 세상을 하나 둘씩 배워가는 아이들에게 신기한 발견이다. 그 매혹은 어른이 되어서도 결코 줄어들지 않는다. 쇼핑은 언제나 솔깃하고 신나는 일이다. 주머니 사정이 여의치 않으면 눈요기만으로도 즐겁다. 그 반짝이는 호기심에 편승하여 백화점은 일년 내내 각종 바겐세일을 행한다. 그래서 건물에는 언제나 ‘SALE’이라는 현수막이 걸려있다. 그 글자를 한참 들여다보고 있으면 다른 발음으로 읽히기도 한다. ‘살래?’ 견물생심이 가장 쉽게 일어나는 곳이 백화점이다. 풍요의 시대에 창궐하는 맹목적 구매 충동을 바이러스에 빗대어 비판하는 [어플루엔자 (affluenza)]라는 책도 있다.

새로운 생활양식을 창출하면서 다채로운 도시문화를 꽃피워 온 백화점. 그것은 한 건물 안에서 수많은 물건들을 판매하는 대규모 소매상으로서, 근대적인 상품 스펙터클의 거대한 전시장이었던 박람회에 뿌리를 두고 있다. ‘department store’라는 말처럼, 백화점은 여러 상품들을 체계적으로 분류하여 진열한다. 매장의 구성을 보자. 어느 백화점이나 지하에는 식품 매장이 있고, 1층에 화장품이나 귀금속 등이 들어서 있다. 2, 3층은 예외 없이 여성 의류를 취급한다. 그리고 4층부터는 남성 패션, 스포츠, 유니섹스, 아동 등이 두 세 층에 걸쳐 배합되어 있다. (어느 백화점은 ‘영웨이브’와 ‘영캐릭터’를 각각 한 층씩 배당하여 젊은이를 겨냥하고 있다.) 그리고 그 위 두 세 층쯤에 걸쳐 가구 및 가전제품 류, 문화행사장과 식당가가 들어서 있는 것이 일반적이다.

1층에서 3층까지의 상품 배치를 보면 여성고객을 우선시하고 있음이 선명하게 드러난다. 그런데 1층에 화장품이나 귀금속 매장을 배치하는 까닭은 무엇일까. 고객들이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럭셔리’한 분위기에 흠뻑 젖어 감각의 회로를 환상적인 소비 모드로 전환하도록 하기 위함이 아닐까. 고객들을 조금이라도 더 머물도록 붙잡아두기 위한 공간 설계는 치밀하다. 1층에 화장실이 없거나 엘리베이터를 구석진 곳에 배치한 것, 에스컬레이터의 상하행선을 멀리 둔 것 등은 손님들이 어쩔 수 없이 여러 매장을 접하도록 유도하는 장치다.

카지노에 없는 것으로 창문과 시계와 거울을 꼽는다. 그 안에서는 세상과 시간과 자아를 망각하고 도박에 몰입할 수 있다. 그런데 백화점에도 창문과 시계가 없다. 반면에 거울은 대단히 많다. 옷이나 화장품 판매장은 물론 에스컬레이터에서도 옆이나 앞쪽으로 자신의 얼굴을 비춰볼 수 있다. 세상과 시간을 잊고 자아에 마음껏 도취하고 탐닉할 수 있는 곳이 백화점이다. 홍보물에 실린 문구들을 보자. ‘Always with You’, ‘In Your Mind’, ‘For Your Good Life’, ‘Make Your Style’, ‘당신의 하루에 아름다운 에너지를 더합니다.’ ‘단 한 사람, 특별한 당신을 위한 쇼핑 프로포즈’…. 연인끼리 주고받는 사랑의 고백으로 가득 차 있다.

단순한 립 서비스가 아니다. 주차 안내 요원은 상냥한 목소리와 깜찍한 몸짓으로 환영을 표시하고, 매장의 점원들은 깎듯한 매너로 손님에게 최선을 다한다. 지난 해 상류층을 겨냥해 야심 차게 명품 위주의 특별 매장을 연 어느 백화점의 경우, 결혼식의 신랑처럼 말끔한 정장으로 차려입은 도어맨이 손님이 드나들 때마다 정중하게 문을 열어준다. 백화점은 단순히 좋은 물건을 구매하는 것 이상의 만족감을 제공하는 것이다. 그런 눈으로 점원들의 남녀 구성을 보면 흥미로운 점 한 가지가 발견된다. 웬만한 매장에는 거의 여자 점원이 서 있는데, 남성 의류와 가구 및 가전제품 그리고 구두 매장에는 주로 남자 점원이 손님을 맞이한다. 남성 의류는 당연하고 가구와 가전제품은 남자의 설명이 더 전문적인 듯 보일테니 그렇다 치자. 여성용 구두 매장에 남자 직원이 있는 까닭은? 남성이 신발을 신겨 줌으로써 신데렐라가 된 듯한 기분을 선사하려는 것이 아닐는지.


그런데 고객 감동을 연출하기 위해서 점원들이 받아야 하는 스트레스는 크다. 상대방이 아무리 거칠게 나와도 미소를 잃지 않아야 하고, 점원을 하대하는 저질 손님 앞에서도 무조건 참아야 하기 때문이다. 자신의 기분 상태와 관계없이 고객의 유쾌한 마음을 자아내야 하는 ‘감정 노동’의 괴로움을 백화점 점원들은 늘 겪고 있다. (<한겨레21> 2005년 6월3일치 참조) 백화점의 어두운 얼굴이 또 하나 있다. 매스컴에서 자주 보도되듯이 비상통로를 창고로 사용하는 행태가 그것이다. 이윤에만 골몰하여 안전 문제를 외면하는 그 비리의 계보를 추적하다 보면 삼풍백화점의 악몽에 마주치게 된다. 그것은 화려한 외양이나 포장된 친절보다 생명에 대한 배려가 훨씬 중요함을 새삼스럽고도 뼈아프게 가르쳐준 참사였다.

오늘도 백화점은 들뜬 발걸음으로 북적인다. 백화점에서 샀다는 것은 각별한 의미를 지닌다. 그래서 쇼핑 나온 가족과 벗들의 표정은 밝다. 거기에서 우리는 구매 행위 자체를 소비한다. 각양각색의 브랜드로 자아를 디자인하면서 만끽하는 행복감에 그곳은 언제나 축제다. 그러나 백화점이 허영의 시장만은 아니다. 누군가를 위해 선물을 고르는 이들의 마음은 자기를 비우는 기쁨으로 충만하다. 그 사은(謝恩)의 손길이 또 다른 호혜(互惠)로 번져나가면서 삶의 자리는 한결 넉넉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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