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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6.01.12 16:30 수정 : 2006.01.13 16:45

역사로 보는 한주

1898년 1월13일 프랑스 일간지 <로로르>는 1면 머리에 ‘나는 고발한다’라는 대문짝만한 제목을 달고 장문의 ‘에밀 졸라가 공화국 대통령에게 보내는 편지’를 실었다. 프랑스 자연주의문학의 대가 에밀 졸라(1840-1902년)가 쓴 이 공개서한은 프랑스 국론을 양분했을 뿐 아니라 전 유럽을 들끓게 만들었던 진실과 거짓의 싸움, 자유·민주주의·공화제 대 우익국수주의·군국주의의 대결장이었던 ‘드레퓌스 사건’의 흐름을 바꿔놓았다. 그리하여 때와 장소를 초월해 지식인의 역할을 얘기할 때 떠올리는 기념비적인 작품이 됐다.

그 4년 전인 1894년 9월 프랑스 육군정보부는 파리 주재 독일무관 집에서 프랑스군 내부에 비밀정보를 독일쪽에 흘리는 자가 있음을 보여주는 메모를 입수했다. 육군 참모본부는 필적 등을 근거로 참모본부의 유대인 포병대위 알프레드 드레퓌스를 체포했다. 이 사실을 반유대계 신문 <자유언론>(이름도 찬란하다!)이 대대적으로 보도하면서 유대인을 매국노로 매도하고 군부의 우유부단을 격렬하게 성토했다.

당시 프랑스는 프러시아(독일)와의 전쟁(보불전쟁·1870-1871년)에서 진 뒤 배상금 50억 프랑을 지불하고 알자스-로렌 지방의 대부분을 독일에 내주는 치욕속에 경제난까지 겪고 있었다. 로트실트(로스차일드) 등 유대계 금융자본은 국민들의 저축을 끌어들여 동유럽 등에 투자했으나 1882년의 금융공황으로 많은 투자은행들이 파산했다. 금융계의 큰손인 유대인들에 대한 증오가 자라고 있었고, 한편에선 보수우파와 군부가 독일에 앙갚음하자며 애국주의를 선동했다. 불랑제 장군의 우익 쿠데타 미수사건도 일어났다.

보수우익 <자유언론>의 선동에 당황한 군부는 비공개 군법회의를 열고 무죄를 주장하는 드레퓌스에게 종신금고형을 내리고 남미의 프랑스령 기아나 앞바다 ‘악마의 섬’에 유폐시켰다.

2년 뒤인 1896년 새 정보부장 피카르 중령은 진범이 헝가리 태생의 에스테라지 소령임을 밝혀냈다. 그러나 권위 실추를 두려워한 군 지도부는 그 사실을 얼버무리며 오히려 피카르를 좌천시키고 형식적인 재판절차를 거쳐 에스테라지를 무죄석방해버렸다. 졸라의 ‘나는 고발한다’가 신문 1면을 장식한 것은 그 이틀 뒤였다. 그는 박해를 각오하고 실명을 거론하며 군부의 비열한 음모를 까발렸다.

여론이 들끓고 사건 재심을 요구해온 ‘인권옹호동맹’ 등의 반격에 힘이 실리기 시작했다. 반대파는 ‘프랑스 조국동맹’을 결성해 국가의 존엄, 군부의 위신을 부르짖었다. 그 뒤 드레퓌스 유죄 입증 문건의 날조 사실이 판명되자 군부는 재심군법회의를 열었으나 유죄판결을 뒤집진 않았다. 드레퓌스는 총리의 특사형식으로 석방됐지만 그가 무죄판결을 받고 명예를 회복한 것은 1906년에 가서의 일이다. 그 뒤 우익들이 대거 퇴조를 면치 못한 것은 사필귀정이었다.

한승동 선임기자 sdh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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