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괴벨스, 대중선동의 심리학
랄프 게오르크 로이트 지음. 김태희 옮김. 교양인 펴냄. 3만9000원 |
언론통폐합 주도하고
거리와 광장에 ‘제국 스피커’ 가동
패전 다가오자 가족 집단자살로 생애 마감
신체적 장애가 문제였을까
군입대 거절당해서였을까
독일 제3제국 선전장관 괴벨스는 신문은 ‘부패의 전령’ ‘몰락의 인도자’로, 착한 독일인의 신앙과 도덕, 민족감정을 오염시킨다고 보았다. <전진> <적기> 등 좌파 언론을 폐간시켰다. 또 ‘제국정부 언론심의회’를 이용해 언론사에 지시와 지령을 내렸다. 3개의 통신사는 국가 독점의 독일통신사(DNB)로 통합되었다. ‘편집인 법률’로써 신문과 잡지 발행인이 지던 책임을 편집인도 나눠지도록 해 언론획일화의 획을 그었다. 미움을 사면 직업명단에서 삭제당하거나 경고를 받거나 수용소로 인계될 수도 있었다. 지역방송국들은 베를린 중앙방송국 휘하의 제국방송국으로 통폐합됐다. 지역방송국 간부들은 물론 구조조정을 통해 제국방송사 간부 136명을 털어냈다.(415~420쪽)
어디서 본듯하지 않은가. ‘우리의 자랑스런 신군부’가 자행한 언론사 통폐합, 언론인 강제해직을 연상시킨다. 1980년 11월 신군부는 <신아일보>를 <경향신문>에 흡수시키고, 경향신문을 와 분리했다. 또한 지방지는 1도1사를 원칙으로 통폐합했으며, 통신사는 기존의 6곳을 폐지하고 신문협회와 방송협회가 출자하여 단일의 <연합통신>을 설립했다. 방송쪽은 를 한국방송공사로 개편하면서 동양방송(TBC), 동아방송(DBS)을 편입시켰다. 이로 인해 언론사들은 붓을 꺾어야 했고 1300여명의 언론인이 떨려났다. 신군부는 또한 ‘보도지침’을 통해 정권에 우호적인 기사를 쓰도록 압박했으며, 정권의 ‘나팔수’ 역할을 하는 언론에는 갖가지 특혜를 주었다.
<괴벨스, 대중선동의 심리학>(교양인 펴냄)은 독일민족의 영혼을 마비시키고 수백만 유대인을 학살한 히틀러의 심복중 심복으로 선전장관을 맡아 독일, 유럽, 나아가 전 세계에 대재앙을 안겨주었던 인물 요제프 괴벨스(1897~19450)의 평전이다. 가치평가나 반성 등 분석적이지 않고 기록에 충실한 지은이는 읽는 이로 하여금 소름돋게 만드는, 누구도 다시 나타나기를 바라지 않는 인간의 궤적을 있는 그대로 보여준다.
편지·일기 통해 인격형성 추적
|
하급군인 출신, 사회 부적응자가 대부분인 나치 지도부에서 인문학 박사학위를 지닌 요제프 괴벨스는 특별한 존재였다. 타고난 연설가에 천재적인 선전가인 그는 대중매체의 효과를 일찌감치 깨달아 이를 대중선동에 활용했다. 1927년 3월 나치 돌격대를 위해 두번째로 연 ‘메르커의 날’ 행사에서 대원들 앞에서 연설하는 괴벨스. 그가 조직한 선전 집회는 항상 청중의 감정과 본능에 호소하여 열광을 불러일으켰다. 사진 교양인 제공
|
선전장관의 평전에서 독일의 미디어사를 기대한 독자라면 실망할 터이다. 언론정책을 개괄적으로 기술하고 있을 때문. “괴벨스는 라디오에 주목했다. 생긴 지 10년도 되지 않은 이 매체를 텔레비전이 발명되기 전까지 전제주의 국가에 자연스럽게 복무하며 대중선동에 가장 중요한 도구로 간주했다. 그에 따르면 라디오만이 국민의 완전한 장악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었다. 그는 방송국망을 확장하고, 길거리와 광장에 ‘제국 스피커 기둥’을 설치하고 저렴한 수신장비 생산을 추진했다. ‘국민 수신기’라 불리며 76마르크에 팔린 이 라디오를 사람들은 ‘괴벨스의 주둥이’라고 불렀다.”(418쪽) 영화의 제작과 활용에 관한 설명은 소략한 반면, 괴벨스와 직접 관련이 없는 러시아쪽의 폴란드 군인 학살에 지면을 할애하고 있다. ‘한국의 괴벨스’는 뭘하고 있을까 괴벨스의 역할은 히틀러를 총통으로 만드는 것이었다. 그는 히틀러를 ‘구원자’ ‘메시아’로 선포했다. 그 결과 사람들은 그에게 기도하고 그를 직접 보면 열광하고, 여성들은 심지어 집 한쪽에 있는 ‘하느님을 위한 공간’을 ‘총통을 위한 공간’으로 만들어 사진과 꽃으로 장식했다. 총통 숭배는 매일 수천 통씩 히틀러의 관저에 쇄도하는 흠모의 편지와 꽃다발이 잘 반영했다.(577~578쪽) 그는 히틀러의 끊임없는 정복전쟁, 대독일 제국이라는 비전을 실현하는데 필요한 여건을 만들었다. 전쟁이 회피되는 때는 평화를 애호하는 총통의 천재성과 사명을 찬양하고, 독일민족을 전쟁으로 끌고 들어가서는 히틀러의 무오류를 설파했다. “총통이 아신다면!”은 이를 상징하는 문장이다. 독일이 위기로 빠져들수록 괴벨스는 비합리주의로 도피해 들어갔고 히틀러를 과도하게 찬양했다. 그 비합리주의가 공격적으로 실현된 것이 총력전이었다. 그러나 새로운 차원의 테러와 수백만 명의 학살도 종말을 늦출 뿐이었다. 그는 이미 체념한 히틀러에게 최후까지 최면을 걸었다. “각하를 둘러싼 폭도들이 ‘저자를 십자가에 못 박아라’라고 소리칠 때 ‘호산나’를 외치며 죽음 앞에서도 절망하지 않는” “강철같은 인물들”에 자신이 속하기를 원한다고 맹세했다. 그러나 괴벨스의 말로는 광신자의 도착에 지나지 않았다. 1945년 5월1일 소련군이 밀려오자 베를린의 총통 벙커에서 역시 광신적이었던 아내 마그다는 여섯 자녀의 입에 청산가리 앰플을 밀어넣었고 괴벨스도 부인과 함께 음독해 반세기에 걸친 미치광이 삶을 마감했다. 그런데, 그런데 말이다. 광주학살을 주도한 ‘전통’과 언론통폐합·언론인 강제해직을 주도한 ‘한국의 괴벨스’ 허 아무개는 어찌되었는가. 임종업 선임기자 blitz@hani.co.kr
기사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