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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지혜/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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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에 이끌렸으나 웬걸 ‘죽음’은 없고
스스로의 존재를 어떻게 증명해 가는가 40일의 구도행각
나는 이렇게 읽었다/박상륭 ‘죽음의 한 연구’
좀 멋쩍은 고백을 하나 하자면, 사춘기 시절 신흥종교에 잠깐 몸담았던 적이 있다. 대부분의 신흥종교가 그렇듯 메시아이즘에 충실한 곳이었고, 때문에 내가 그곳에서 광신을 했든 안했든 상관없이 이 사실을 고백하고 나면 주위에서 죄 이상하게 봤다. 그럴 만도 하다. 매스 미디어를 통해서 보이는 신흥종교, 소위 이단의 모습에 어디 하나 상식적이고 정상적인 구석이 있어야지. 그리고 실제 내막이 그렇기도 하다. 본시 과학과 상식의 논리로 접근해서 비상식의 오류까지 받아들이게 하는 것이 종교의 논리일 텐데, 그 종교를 넘어서겠다고 작정한 곳이 신흥종교이고 보면 그 강도가 한층 높은 것은 당연하다. 게다가 남다른 주위의 시선과 핍박도 견뎌야 하니 논리 무장을 위한 교리 훈련도 엄격하고, 외부와의 교제는 금지 사항이 되며, 청빈하고 금욕적인 생활도 강요받는다. 바로 그 엄격함 덕분에 나는 그곳에서 오래 버티지 못했다. 엄격하고, 성실하고, 꾸준함이란 본시 내게 없는 덕목인 탓이다. 게다가 뭔가에 중독될만한 열정도 없었다. 담배든, 술이든, 여자든, 남자든, 도박이든, 보석이든, 제 아무리 근사하고 요란한 것도 내게는 모두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 천성이 그렇다. 열흘 지나 꽃이 떨어지니 더 있을 이유가 없어졌다.
그래도 그 곳에 있으면서 한 가지는 배웠다. 사람들은 모두 메시아를 필요로 한다는 것, 자신이 메시아가 되거나 자신만은 메시아를 만나야 하거나. 전에는 ‘선민의식’을 오만이거나 자만이라고 생각했는데, 막상 그런 사람들을 겪고 나니 어쩌면 그건 거칠고 험한 세상에서 답 없이 살아가는 인생의 유일한 존재증명일지 모르겠다 싶었다. 그러고 나니 그렇게라도 좀 다르게 살아보겠다는 (나를 포함한) 인간이라는 존재가 어찌나 안쓰럽고 딱하던지. 그렇게 복잡 오묘한 심리상태로 지내던 어느 날 만난 책이 바로 <죽음의 한 연구>다. 순전히 ‘죽음’이라는 단어에 미혹되어 읽기 시작했는데, 웬걸 죽음에 대한 설명은 보이지 않고, 대신에 각종 종교의 경전이 교묘하게 맞물리며 해석되는데, 읽을수록 막혀 있던 머릿속이 펑 뚫리는 느낌이었다. 온갖 어려운 경전이 다 인용되어 있고, 결국은 주인공이 선택받은 자, 곧 메시아라는 결론이 나오지만 종교적이라는 느낌은 전혀 들지 않는다. 오히려 나는 이 책을 불가항력적으로 주어진 삶 앞에서 인간이 스스로를 어떻게 증명해나가야 하는가 하는 물음으로 읽었다. 메시아가 되거나, 메시아를 만나는 일은 그 다음의 문제다.(메시아라는 표현이 부담스럽다면 ‘난 놈’으로 해 두자. ‘난 놈’이 되거나 ‘난 놈’을 만나거나) 40일 동안에 걸친 주인공의 구도 행각(앉아서 하는 구도가 아니라, 먹고, 자고, 싸고, 개기면서 주어진 조건과 맞서는 과정)을 읽으면서 사람은 무언가로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무언가가 되어가는 존재라는 생각도 새삼 했다. 그리고 무릇 메시아는 자신에게 주어진 삶의 연단을 피하지 말고 다 겪어내야 하는데, 그리하여 최후의 구원보다 중요한 것이 치열한 삶의 과정임을 보여줘야 하는데, 세상의 많고 많은 메시아(종교뿐 아니라 정치, 문화 기타 등등의 권력 집단들)는 힘든 과정은 애들 시키고, 혼자 구원의 강가에서 편안히 손짓만 하고 있었구나, 그래서 실패했구나 하는 생각도 같이 했다.
존재 운운했지만 사실 이 책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대목은 주인공이 자신을 따르던 수도부의 장례를 치르는 장면이다. 외로운 혼 혼자 떠돌지 말라고 자신의 혀를 깨물어 수도부의 입안에 넣어주는데, 내가 알고 있는 모든 사랑과 위로의 방식 가운데 단연 백미지 싶다. 문체와 구성이 여느 소설과 달라 낯설게 읽히지만, 편견을 버린다면 의외로 쉽게 읽을 수 있다. 때론 정신이, 그 치열한 맞섬이 삶을 견디게 해줄 때도 있는 법, 가끔은 이렇게 무겁고 딱딱한 책에 도전해 보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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