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6.01.12 18:04
수정 : 2006.01.13 16:48
말글찻집
잘못 쓰는 말이라고 하여 마냥 ‘잘못’일까?
예컨대 ‘반증하다’는 어떤 사안에 반대되는 근거나 증거를 일컬을 때 쓸 말이다. 무죄를 주장하는 데서 유죄임을 들출 증거, 어떤 이론을 허물 사례가 있으면 그것이 ‘반증’(反證)이 된다.
많은 이들이 글에서 ‘반증’을 본뜻 아닌 “앞에 든 말이나 상황을 굳히거나 도와주는” 반영·근거·입증·방증 같은 뜻으로 쓰고 있다. 조리가 서야 할 문장에서 이는 곤란하다.
그런데, 말이란 본디 부정확하여 사람들이 많이 쓰면 이따금 그 현실(버릇)을 인정해주는 ‘관례’가 있다. 반증이란 말의 쓰임이 그런 데까지 이른 말은 아니나, 왜 이 지경이 됐는지 따져보기는 해야 할 성싶다.
△황 교수팀의 줄기세포 연구와 관련된 의혹이 우리의 힘으로 밝혀져 가고 있는 점은 한국의 양심과 지성의 불씨가 살아남아 있음을 (반증하는 것이다). △여러 조사 결과, 직장인들은 ‘미래에 대한 준비 부족’을 가장 큰 고민거리로 꼽았다. 기업들이 늘 구조조정을 벌이고 체감 정년이 점점 낮아지면서 직장인들의 위기의식이 그만큼 높아지고 있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문제는 간단치 않다. 만일 국내 국제법 교과서의 수준이 상당히 높으며, 특정 분야에서 이미 국내에서 상당히 연구가 돼 있는데도 계속하여 외국의 개괄서나 논문만을 인용한다면 이는 곧 국내 연구풍토의 대외 의존도 심화 및 이미 발표된 국내 문헌 간 상호인용 빈곤화 현상을 나타낸다는 (반증밖에 되지 않는다). △타인의 감정과 상태를 배려할 줄 안다는 것은 사실 (능력의 반증이기도 하다). △북한 탄부의 월급은 일반 교원보다 두 배 정도 높은 걸로 알려져 있다. 그만큼 힘든 육체노동을 하고 있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보기월들은, 주로 앞의 사례를 들추거나 바탕 삼아 결론을 끌어내고 있다. 그 사이의 낙차나 빈틈을 ‘반증’이란 말로 메워주려는 마음이 읽힌다. 이는 사실 ‘비추다·반영하다’(영어로 뒤치면 reflect, reflecion 따위) 정도로 쓸 말임을 알 수 있다. 어설픈 번역문투 냄새도 난다. 그렇다고 ‘반증하다’에다 그런 쓰임이나 뜻을 주기는 어렵다.
여기서 이런 정리를 할 수 있겠다. ‘반증하다·방증하다’를 정확히 가려 쓰기 어렵다면 딴말로 바꿔 쓰는 것이다. ‘보여준다, 알려준다, 얘기한다, 증명한다, 일깨워준다, 비춘다’ 들이 대안이다. 멋을 내다 망발을 하기보다 쉽고 순한 말이 낫다.
최인호/한겨레말글연구소장
광고
기사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