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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6.01.12 18:10 수정 : 2006.01.13 16:48

<왜관>
다시로 가즈이 지음. 정성일 옮김. 논형 펴냄. 1만8000원

왜관은 15세기 초 설치된 일본 사신 숙박시설
메이지시대인 19세기 후반까지 존속
평소 400~500명의 일본인이 거주했고
다양한 거래 통해
사람·문화·정보 넘나든 열린공간이었다

에도 바쿠후(막부) 제8대 쇼군(장군) 도쿠가와 요시무네(1684-1751) 집권(1716-1745)시절 일본에 뜨거운 조선 인삼 투기열풍이 불었다. 조선 인삼은 원래 돈께나 있는 사람이 아니면 살 수 없었던 값비싼 약재였다. 그런데 제5대 쇼군 도쿠가와 쓰나요시(1646-1709) 집권시절(겐로쿠·1688-1703) 무렵부터 일반서민들도 관심을 갖기 시작하더니 요시무네 시절엔 인삼 투기붐으로 치달았다.

18C 초 일본에 몰아친 인삼 투키붐

에도(도쿄)의 인삼 소매가격은 1700년(숙종 26년)께부터 폭등하기 시작해 요시무네 시절엔 인삼 1근(600g) 가격이 은 1관440돈(금 24냥)까지 치솟았다. 인삼은 아무리 비싸도 공급자가 거래를 좌우하는 사실상의 독점품목이었고 당시 일본내 공급자는 일본 바쿠후가 지목한 대마도(쓰시마) 지배자 소씨 집안(종가)이었다.

1674년(현종 15년)부터 에도에 설치된 대마도 직영 인삼좌 앞에는 이 무렵 사람들이 장사진을 쳤고 수많은 낭인들이 수고료를 받고 전날 밤부터 순서를 대신 기다려주는 진풍경이 연일 펼쳐졌다. 인삼좌는 품절을 염려해 미리 정해놓은 하루 매상고가 다 팔리면 한낮이라도 문을 닫아버렸다. “집 주인 어르신께 드릴 말씀이 없다”며 자살소동을 벌이는 일까지 벌어지고, 부모의 병을 고치려는 효녀가 인삼을 구하려고 몸을 팔았다는 따위의 소문도 무성했다.

1721년엔 대마도에 파견돼 있던 조선 역관 정사 최상집을 주범으로 65명의 역관사 전원이 공모한 한-일 양국사상 최대 규모의 인삼 밀무역 사건이 터졌다. 은 102관(금 2251냥), 금 21냥, 인삼 80근 등 총 200근의 인삼에 해당하는 물품이 압수됐다. 그 전해의 에도 인삼좌 연간 총소매량이 550근이었으니, 엄청난 규모였다.

17세기 말에 일본이 조선에서 집중적으로 수입해간 물품은 중국산 백사(고급 생사)와 견직물, 그리고 조선 인삼이었다. 수입액 전체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중국산 백사(50%)와 견직물이 80%, 나머지 20%가 조선 인삼이었다. 1691년 대마도가 조선-일본간 사무역을 통해 거두어들인 연간 수익금만 금 7만냥에 이르렀다. 일본은 조선에 은·구리·납·유황 등 광산물과 여우·너구리 등 가죽류, 물소뿔·단목·후추·담배·안경 등 동남아시아산 물품들(당시 조선 상류층의 필수품이었다), 무기 등을 팔았으나 수출액 대부분을 차지한 것은 광산물이었으며 그 가운데서도 은 한 품목이 66%를 차지하고 있었다. 이들 교역 지불수단이 바로 은이었고 에도 바쿠후가 주조한 순도 80%의 은화 ‘경장정은’의 90%가 이런 국제무역을 통해 조선, 중국 등으로 빠져나갔다.

‘바쿠후 중흥의 영주’로 불렸던 요시무네 쇼군이 조선에 밀사들을 파견해 30여년에 걸친 대규모 조선 동식물 조사에 착수하고 인삼 생초(모종) 입수 극비작전에 돌입한 데는 이런 시대배경이 깔려 있었다. 요시무네는 허준의 <동의보감>을 일생 동안 곁에 두고 살았을 만큼 당시 의료 선진국 조선의 약재와 의학 따라잡기에 큰 관심을 쏟았지만, 인삼 재배기술을 확보해 은의 대량유출을 막는 것도 주요 정책목표로 삼았다. 그는 이와함께 조선의 관료제도와 조세징수법, 인구, 관직 종류와 봉급, 도량형 등 ‘국가기밀’을 조사하는 프로젝트도 동시에 진행시켰다. 이때 역관, 한의사 등 다수의 조선인들이 돈을 받고 일본 밀사들을 도왔다. 밀무역죄로 중형을 받게 될 최상집 등 역관사들의 범행을 조선 조정에 알리지 않고 대신 그들을 조사 프로젝트에 협조하도록 얽어넣는 수법도 동원했다.

조선과 일본 사이에서 이런 공사거래와 기밀 프로젝트 중개를 도맡다시피했던 것은 역대 대마도 소씨 가문이었으며 그들의 조선내 활동거점이 바로 왜관이었다. 메이지 시대 초기인 19세기 후반까지도 존속됐던 왜관은 조선시대 한반도-일본간 교통의 거의 유일한 창구였으며, 진상·공무역·사무역 등의 다양한 거래형태를 통해 사람과 재화, 문화, 정보가 의외로 자유롭게 대규모로 넘나든 열린 공간이기도 했다.

1678년(숙종 4년) 2년여에 걸친 공사 끝에 완공돼 2백여 년을 이어간 조선 속의 일본인 마을 부산포 새 왜관(초량왜관) 모습. 위쪽 중앙의 기암괴석은 오륙도다. 10만 평 부지 위에 조성된 새 왜관 신축은 조선인 목수와 인부가 연 125만 명, 일본인 목수와 인부 연 2천여 명, 조선쪽에서 지불한 비용만 쌀 9천석, 은 6천냥이 투입된 조-일 합작 거대 프로젝트였다. 국사편찬위원회 소장 <부산포 초량화관지도>
조선에 밀사보내 인삼모종 입수 시도

다시로 가즈이 게이오대 교수(근세 한일관계사)가 2002년에 출간한 <왜관-조선은 왜 일본사람들을 가두었을까>(원제 <왜관-쇄국시대의 일본인 마을>)는 이런 사정들을 생생하게 그렸다. 다시로 교수는 왜관을 드나들었던 배와 사람 숫자, 대마도 사절들의 조공의례인 조선국왕 숙배 등 공식행사, 거래량 등은 물론 갖가지 요리에 들어간 양념들, 남녀밀회, 살인사건, 호랑이 사냥, 밀사들 행적 등을 손금보듯 세세하게 재생해냈다. 이를 가능하게 한 결정적 자료는 <대마도종가문서>였다. 수백책 분량의 이 방대한 고문서 중 일부가 1926년 총독부 산하 조선사편수회로 넘어갔고 1970년대 이후 일반 연구자들에게도 널리 알려졌다. 지금 과천의 국사편찬위원회에 원본과 함께 마이크로필름으로 보존돼 일반인에게도 공개되고 있다.

왜관은 조선 건국 직후인 15세기 초 일본인 사절을 접대하기 위해 한양에 설치된 객관인 ‘동평관’에서 시작됐다. 당시 한양엔 중국사신을 위한 태평관, 여진인을 위한 북평관 등도 있었는데, 지금의 서울 충무로쪽에 있던 동평관은 왜관이라 통칭했다. 왜관은 한때 한양뿐만 아니라 부산포, 제포(진해만 웅천), 염포(울산) 등의 항구에도 설치된 적이 있다.

왜관은 대마도 경제의 젖줄

삼포왜란(1510)과 임진왜란(1592) 등을 거치며 성쇠를 거듭하던 왜관은 1607년 조선통신사의 일본방문을 계기로 부산포에만 정식으로 다시 설치됐다. 당시 왜관은 지금의 부산광역시 수정동 일대 바닷가에 있었으며 두모포왜관, 고왜관이라고도 불렀는데, 지금 ‘고관’이라는 지명으로 흔적이 남아 있다. 1678년에는 지금의 부산 용두산 일대 10만여평 넓이의 부지에 연인원 125만명의 인력이 투입된 조-일 합작 대역사 끝에 신왜관(초량왜관)이 완공돼 메이지정부가 접수할 때까지 200여년간 존속했다.

왜관은 17세기 ‘쇄국령’이 내려진 일본의 유일한 해외 일본인 마을이었으며, 대마도 경제의 젖줄이었다. 17세기 말 부산왜관을 통한 일본 은의 수출 물량은 중국 무역선을 통한 물량의 7배 이상이었으며, 대마도는 주식인 쌀을 대부분 조선에서 수입했다. 왜관에는 평소 400-500명의 일본인(모두 남자들만!)이 거주했는데, 이는 대마도 장년층 남자 20명 가운데 1명이 거기에 가 있었던 꼴이라고 한다. 왜관을 알고나면 한-일관계사도 새로 보일지 모른다.

한승동 선임기자 sdh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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