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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6.01.12 19:06 수정 : 2006.01.13 16:50

최성각/소설가, 풀꽃평화연구소장

한달 책값 1만3천원 한국인 상대로
입시제도 재테크책도 아닌 환경책 읽으라는 자들
확실히 정신나간 사람들임에 틀림없다
그런 책 펴내는 출판사들 더 바보 아닐까

녹색 에세이/달려라 냇물아

새해 벽두에 통계청이 발표한 지난해 3분기 가구당 평균 소비지출 내역은 새삼 충격적이었다. 여러 매체들은 특히 그 통계의 핵심을 ‘책값에 인색한 한국인’ 쪽으로 잡아 보도하고 있었다. 내용인즉, 한국인들이 책을 구입하는 데 거의 돈을 쓰지 않는 것으로 드러났다. 신문값 1만2천원을 포함해 잡지와 애들 동화책까지 포함해 한달 책값이 1만397원이었다. 전체 소비지출(204만8902원)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0.5%였다. 2004년 같은 기간의 책값은 1만148원이어서 그나마 좀 늘었다지만, 2003년(1만774원)에 견준다면 3.6% 줄어들었다. 외식비는 24만5천원, 사교육비 14만9천원, 통신비 13만2천원, 그리고 옷 사 입고 장신구 사서 가꾸는 데 드는 돈은 6배 이상이다. 한마디로 한국인들 거의 돈 들여 책을 안 산다는 이야기다.

이번 통계결과는 해석하기에 따라 시사하는 바 의미가 깊다. 출판계의 양극화 현상이 깊어진다는 우려도 들리지만 출판계 사람들에게 이런 통계는 어떻게 해석되고 있을까. 잘은 모르지만, 시멘트 바닥에서 꽃을 피우려는 무모한 노력이 재삼 확인되어 어쩌면 하던 일을 때려치우고 싶은 허탈과 깊은 낭패감에 사로잡히지 않았을까 싶다.

환경판의 몇 소중한 사람들과 뜻이 맞아 벌써 4년째 매년 ‘환경의 날’ 즈음에 교보 매장을 빌려 ‘환경책 잔치’를 벌이고 있는 사람으로서 이런 통계가 주는 남달리 황당한 심사가 있다. 이 황당한 느낌은 출판업에 종사하는 이들의 그것과는 조금 다른 절망감이라 할 수 있다. 이다지도 책을 안 읽는 사회에서 ‘환경책’이라는 신조어를 개발해 그 범주를 애써 정하고, 환경책 독서의 의미를 부여하고, 환경책 출판을 하고 있는 출판사에게는 ‘한우물상’이라는 형태로 감사 인사를 드리고, 독자들에게는 “새로운 세계를 접하면 다르게 살 수 있을지 모른다“고 호소하는 이 한심스러운 책잔치가 어쩌면 플래카드 내걸어 사람들 모아 얼음판 밑에서 빙어를 건져내 기름에 튀겨먹는 강원도 산간지방의 빙어잔치만도 못할지 모른다는 모질고도 겸연쩍은 자괴감 말이다.

심하게 말해서, 이런 사회가 안 망하고 설렁설렁 굴러가는 게 신기할 정도다. 이런 사회에서 희망을 이야기하는 것은 어쩌면 자기기만일지도 모른다. 한 사회에 만약 얼굴이 있다면 부끄럽고 창피해 뻘개진 얼굴을 수직으로 떨궈야 할 판이다. 교육열은 이 지구별에서 두 번째 가라면 서러워할 정도로 높고, 문맹률 낮기로도 세계에 자랑할 만한 한국사회건만, 졸업하면 그날부터 책 안 읽는다는 이야기다. 교육의 목표가 세칭 일류대학 입학이고, 입학 후의 목표는 오로지 취업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일은 어찌 생각하면 조금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한 민족집단의 공동기억인 ‘국사’가 선택과목이고, 언제부터인지 국어국문학과 앞에 ‘미디어’라는 해괴한 당의정이 붙더니만, 지방대학의 경우에는 그나마 있는 국문과도 없애고 무슨 ‘미디어문화과’ 어쩌구 돌아가는 판이니 따로 무슨 할 말이 있을까. ‘나라’로 말해도 ‘민족’으로 말해도, 어불성설의 끔찍한 일들이 뻔뻔스러운 현실이 되어버렸다.

대학의 일부 학과가 그 존속 때문에 시대 흐름에 아부하는 조어를 만들어 견뎌내려는 모습도 안쓰럽긴 하지만, 진작부터 황당한 일이 일어난 것은 인문학을 적극적으로 죽인 지난 정권의 교육관이었다. 이를테면, 정부 부처의 명칭만 해도 그렇다. ‘문화관광부’도 문제적이지만, ‘교육인적자원부’가 뭔가. ‘사람’을 키우는 교육에 어떻게 ‘자원’이라는 광물질의 아우라를 지닌 말이 그토록 천역덕스럽고 당당하게 결합될 수 있을까. 그런 기능주의가 공공연해지다 보니 급기야는 최고 통치권자의 입에서 ‘대학이 산업’이라는 말도 튀어나오고 말았다.

늪지에 페테르부르크를 건설하느라 사람들 엄청 죽인 제정 러시아의 피터 대제는 “모든 인간은 정해진 의무를 가진 법률적인 재산의 일부분이다”라는 칙령을 내렸다. 국가는 곧 피터 대제 자신이었으므로 모든 인간은 곧 자기 소유물이라는 과대망상이었다. 부채질하듯 살육을 일삼었던 중국 황제들의 백성관도 오십보백보이긴 했다. 거기서 인류는 좀더 바람직하고 마땅한 방향으로 나아갔을까. 틈만 나면 일 없이도 습관처럼 ‘대통령’을 조지는 언론재벌과 재벌언론의 ‘표현의 자유’가 한껏 구가되는 것을 보면, 진일보한 것 같기는 하다. 그렇지만 골똘히 고쳐 생각해봐도 그렇다. 사람이 어떻게 자원인가.


모름지기 우리 시대는 타락했다. 어떻게 타락했는지도 모를 만큼 철저하게 비천해졌다.

그런 가운데 바보처럼 환경책 잔치를 벌여놓고, 사람들 앞에서 떠들었다.

“환경 이야기는 절대 어려운 이야기가 아닙니다. 환경책에는 지금 우리네 살림살이를 최소한이나마 사람답게 지속하기 위한 깊은 고민과 모색이 배어 있고, 생각이 세상을 바꾼다는 신념과 뜨거운 감성이 있고, 의심하지 않고 진행되는 우리 문명에 대한 진단이 있고, 인간의 얼굴을 한 상식의 힘도 보여주고 있고, 자궁의 마음과 땅의 마음과 어머니의 마음이 담겨 있습니다. 그뿐 아니라 우리네 희망의 근거인 다음 세대가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에 대한 해법이 상상력과 감수성에 호소하는 방식으로 담겨 있습니다.”

수입의 0.5%밖에 책값으로 쓰지 않는 사회에서 나는 그런 헛소리를 해댔다.

그뿐인가. 신이 나서 단오장의 약장수처럼 단언했다. “생명과 행복의 문제가 환경책보다 더 정직하게 담겨 있는 책들을 우리는 알지 못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가 환경책이라 부르는 책들은 우리 시대가 요구하는 좋은 책들의 정수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라고.

입시책도 아니고, 취업책도 아니고, 사법고시나 행정고시 책도 아니고, 그 흔해빠진 처세술책이나 재테크 책도 아닌 낯선 환경책 읽기 운동에 뛰어든 우리 환경책 잔치 패들은 확실히 정신나간 사람들임에 틀림없다. 팔리지 않을 줄 뻔히 알면서도 꾸준히 진지한 환경책을 펴내는 출판사들은 “그런 책들로 다르게 살자”고 독서운동을 벌이는 우리보다 더 바보들일지도 모른다.

그 한심한 바보들에게 힘내라고 어떻게 격려해야 할지 정말 난감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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