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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6.01.12 19:19 수정 : 2006.01.13 16:50

수많은 이황화탄소 중독 환자를 만들어낸 원진레이온의 작업 광경. 공장이 폐쇄된 뒤 이 기계들은 중국으로 이전됐다고 한다. 이로 인해 또 얼마나 많은 중국인이 같은 직업병으로 고통을 당하고 있을까? 장철규 기자 chang21@hani.co.kr

수렵·채취사회의 자연적 건강이
농경사회 와선 골관절계 질환 등 악화
노동을 건강 구성요소로 본 라마치니
52개 직종 노동자 질병 분석
훗날 산재 보상법 재정 길터


의학속 사상 /(13) 노동의학의 시조 라마치니

의학의 역사를 해석하는 방식에는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다. 가장 흔한 방식은 원시시대로부터 현대에 이르는 시간을 직선적 발전의 과정으로 보는 이른바 휘그적(Whiggish) 해석이다. 이 방식에 따르면 인간의 건강과 수명은 지속적으로 증진ㆍ연장돼 왔으며 그 과정에는 의학의 발전이 절대적 구실을 했던 것으로 된다. 고대로부터 지속적으로 길어진 평균수명이 그 증거로 제시된다.

그러나 고고병리학적 연구들에 의하면 이 가설이 언제나 들어맞는 것은 아니라고 한다. 예컨대 인류의 역사에서 가장 오래 지속됐던 수렵과 채취를 기반으로 한 경제사회의 평균수명과 건강수준은 농경사회의 그것에 비해 우수했다는 증거들이 무척 많다고 한다.

이런 증거들을 심각하게 고려한다면 우리는 다음과 같은 추론을 해 볼 수도 있다. 곧, 의학은 인간의 생활방식과 자연의 조화가 깨진 상태에서 건강을 지키기 위한 ‘인위적’ 노력의 산물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수렵ㆍ채취 사회의 건강이 자연적 ‘현상’이었다면 문명 이후의 건강은 의학이라는 인위적 노력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는 하나의 ‘목적’이 된다. 여기서 그 목적을 설명하는 의학적 이론이 나타나고 그 이론에 따른 생활방식이 ‘처방’된다. 건강의 방향이 ‘자연적 조화의 회복’으로부터 ‘인위적 목적의 달성’이라는 쪽으로 전환된 것이다.

하지만 르네 듀보는, 모순처럼 보이는 건강의 두 방향이 언제나 우리와 함께 해 왔다고 주장한다. 그는 이를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치료의 신 아스클레피오스(Asclepios)와 위생과 보살핌의 여신 히게이아(Hygeia)에 의탁해 설명한다. 전자가 목적으로서의 건강을 추구한다면 후자는 문명 이전에 누리던 조화로운 상태의 회복을 도와준다. 현대적 의미에서 보면 전자는 이미 발생된 질병을 다루는 치료의학을 대표하며 후자는 발병 이전의 섭생을 관리하는 예방의학과 보건학을 상징한다. 후자가 질병의 원인을 인간의 활동과 환경에서 찾는 반면 전자는 우리의 생물학적 실체인 몸속에서 찾는 셈이다. 이 글에서는 이 둘 중 경제활동과 환경의 흐름을 따라가 보도록 한다.

수렵과 채취를 생계수단으로 삼던 우리 조상들은 대체적으로 무척 건강한 삶을 살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자연에 존재하는 다양하고 풍부한 동식물을 섭취했으므로 영양상태도 좋았을 것이며 주거지를 계속 옮겨 다녔으므로 배설물과 같은 오염원을 피할 수도 있었다. 그들의 건강을 위협했던 것은 질병보다는 주로 사냥 중에 발생한 외상이나 열매를 따러 올라간 높은 나무에서 떨어지는 등의 것이었다. 그와 같은 손상에 대한 대처방법도 주로 직접적 경험과 직관에 의존하는 것이어서 체계적 의학이 발달하기는 어려웠다.


단순반복 농사일이 병 불러

농경기술이 발달하고 사람들이 일정한 지역에 모여 살게 되면서부터는 상황이 크게 달라진다. 몇 안 되는 종류의 작물과 길들여진 동물에 의존하여 살게 됨에 따라 비타민과 같은 필수영양소의 섭취가 어려워지면서 영양실조가 많아진다. 많은 사람이 모여 살게 되면서 배설물과 폐수와 같은 오염물질에 의한 전염병이 발생하고, 오랜 시간 일정한 자세로 단순작업을 반복하는 농삿일로 인해 골관절계 질환이 많아진다.

계급의 분화가 일어나고 시간적 여유가 많은 지배계층에 의해 학문이 일어나는데 이 중에서도 건강의 문제를 다루는 의학이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된다. 이렇게 의학은 자연과 일체가 된 삶이 깨지는 시점에 발생하여 한 흐름은 무너진 조화를 회복하는 방향으로, 다른 흐름은 변화된 환경에 맞는 새로운 건강을 찾는 방향으로 발달해 간다.

직업과 관련된 질병은 이미 고대 서양의학을 집대성한 갈레노스의 저작에 언급되고 있다. 검투사를 돌보는 일을 담당했던 갈레노스는 검투사의 질병과 외상뿐 아니라 광부 등의 직업병에 대해서도 비교적 자세히 기록하고 있다. 하지만 그런 질병을 예방하고 치료하기 위한 방법을 제시하기보다는 운명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식으로 언급하고 있다는 점에서 아쉬움을 준다. 이후 17세기에 이르기까지 직업병을 다룬 문헌은 광부들이 걸리는 병에 관한 것 몇 가지 말고는 거의 보이지 않는데 이는 아마도 직업 활동과 관련된 환경을 새로운 자연으로 인식하고 거기에 순응하려고 노력한 결과가 아닌가 싶다.

세금 많이 부과받아도 직업병

노동의학의 시조 라마치니의 초상화.
하지만 새로운 환경을 받아들이고 적응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여기에는 오염물질과 과도한 노동을 받아들이는 인체의 생물학적 한계뿐 아니라 그러한 환경을 감내하는 사회적 인내력의 한계가 포함된다. 18세기가 시작되는 1700년에 발간된 라마치니(Bernardino Ramazzini; 1633~1714년)의 <노동자의 질병>은 그러한 한계점에서 탄생한 노동의학의 기념탑이다. 여기서 그는 광부, 도자기공, 석공, 레슬링 선수, 농부, 간호사, 군인 등 52개 직종의 노동자들이 겪을 수 있는 건강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여기에는 화학물질, 먼지, 금속 등과 같이 자극성 있는 물질을 다루는 노동자의 질병이 주로 언급돼 있지만, 과도하게 많은 세금을 부과받은 사람, 펜으로 글씨 쓰는 일을 주로 하는 서기나 공증인, 성병에 걸린 여인의 분만을 돕는 조산원, 귀족과 성직자 등 거의 모든 계층의 직업이 망라돼 있다.

이주노동자에게 전가된 위험

이 책은 나중에 공장안전과 산업재해의 보상에 관한 법률이 제정되는 데 큰 기여를 하게 된다. 라마치니는 갈레노스처럼 직업병을 운명으로 받아들이지는 않았으며, 예방을 위한 적극적인 노력을 주문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그가 노동자들의 작업조건을 개선하기 위한 사회개혁에 얼마나 적극적이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는 개혁가이기보다는 면밀한 관찰에 근거해 질병을 설명한 과학자라고 보는 것이 더 적절할 것 같다.

라마치니는 과학혁명이 한창이던 17세기 이탈리아에서 나타나고 있던 질병현상을 연구했지만 그 방법은, 직업이라는 요소가 추가돼을 뿐, 고대 히포크라테스의 <물, 공기, 장소>와 거의 같은 것이었다. 이 때문인지는 알 수 없으나 이탈리아 사람으로는 처음으로 회원이 된 독일 학술원에서 그는 히포크라테스 3세라는 별칭을 얻었다고 한다.

라마치니는 자연환경과 함께 노동을 건강의 중요한 구성요소로 승격시켰다는 점에서 노동의학 또는 산업의학의 시조로 불린다. 하지만 그의 업적이 현실사회에서 빛을 발하기까지는 긴 세월과 함께 노동자의 건강을 기본권의 하나로 받아들이는 인식의 대전환, 그리고 이를 현실에 적용할 수 있는 사회적 시스템이 필요했다.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노동자의 건강문제가 중요 쟁점으로 떠오르기 시작한 것은, 1970년 자신의 몸에 불을 붙여 죽어가면서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고 외친 전태일의 절규 이후라 할 수 있다. 하지만 그 이후로도 노동에 의해 심각한 병에 걸리거나 사망하는 사례는 별로 줄어들지 않았다. 1988년 온도계에 수은을 주입하는 작업을 하던 15살 어린 소년이 수은중독으로 사망하고, 수많은 노동자들이 이황화탄소 중독에 걸려 결국 공장 문을 닫을 수밖에 없었던 원진레이온 사건 등을 겪으면서 우리 사회는 서서히 노동건강의 중요성을 인식하기 시작했다. 이제 노동과 관련된 위험은 대부분 외국인 노동자에게 전가되고 크게 사회적 관심을 끌지도 않게 됐다. 하지만 사회적 약자일 수밖에 없는 저개발국과 그 이주민들에게 노동은 여전히 모험이며, 300여년 전에 쓰인 라마치니의 <노동자의 건강>은 여전히 중요한 메시지를 준다.

강신익/인제대 교수·의철학
현대인에게 인위적 환경과 자연적 환경의 구분은 큰 의미가 없다. 인위적으로 자연을 구현하기도 하고 자연 속에 이미 많은 인위가 숨어 있기도 하다. 이렇게 자연과 인위를 뒤섞어놓은 것이 바로 노동이다. 노동은 자연과 인위를 가르는 기준이지만 노동 자체는 자연의 속성이다. 노동을 통하지 않고서는 생존 자체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이 평범한 진리를 깨닫고 실천하기 위해 우리는 수백년에 걸친 아픈 경험을 해야만 했던 것이다 .philomed@inje.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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