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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경식/도쿄경제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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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서 2년 기거할 집을 물색하다
납득 못할 전세금에 놀랐다
집앞 공원 미끄럼틀 아래 사는 가토씨
돌아오는 길에 언제나처럼 그를 봤다
서울에선 ‘홈리스’ 가 왜 안보였을까
내 눈이 닫혔기 때문일까
심야통신/홈리스 가토씨
앞서 얘기했듯이 지난해 12월 말 1주일 정도 서울에 가 있었다. 그때 이번 봄부터 살 집을 물색했다. 독서와 집필을 위해서는 조용한 환경이 좋다. 그런데 나도 처도 지리를 잘 모르니 교통이나 쇼핑에 편리한 장소여야 한다. 평창동은 조용하지만 불편하다. 강남은 처음부터 대상에서 뺐다. 너무 비싸다고 들었기 때문이다. 서울에 사는 지인의 안내를 받아 서대문구와 마포구 일대 아파트를 보러 돌아다녔다.
서울은 교통비나 식비는 도쿄보다 싸다는 느낌이지만 집세는 비쌌다. 우리 집이 있는 도쿄 교외 K시와 큰 차가 없어 보였다. 임금수준을 고려하면 서울의 집세는 세계적으로도 꾀 높은 편이 아닐까. 전세라는 한국 특유의 임대 시스템은 일본에서 자란 내게는 익숙하지 않아선지 일시불의 전세금은 너무 비싸다는 느낌을 받았다. 몇 곳을 돌아다니며 살펴본 뒤 우리는 그 집들 임대료가 부당하게 너무 비싼 게 아닌지 만나는 사람들마다 의견을 물었다. 그러나 그 사람들은 이구동성으로 “아마 그 정도 할 겁니다”라든가 “여기선 표준적이죠”라고 대답했다. 예상 이상의 비용을 각오해야 될 처지가 되자 처는 좀 심란해진 모양이다.
용케 월세 집 가운데 희망하던 조건에 맞는 것을 찾아냈다. 각오를 다진 뒤 계약을 위해 집주인을 만났더니 유복해뵈는 여성이었다. 계약 때 함께 가 준 지인의 추측으로는, 남편이 대기업 관리직으로 보이는 고임금 직장인이고, 가족 명의로 소유하고 있는 아파트 몇 채를 임대해 주고 있는 듯했다. “그런 사람 많아요”라고 지인은 말했다.
집을 구해서 일단 안도하긴 했으나 어쩐지 납득할 수 없다는 기분이 들기도 했다. 그런 정도의 임대료라면 괜찮다는 얘기는 한국이 어느새 부자나라가 됐다는 말인가?
서울을 떠나기 전 날 모처럼 대전에서 나를 만나러 와 준 지인에게 물어봤더니 “서울은 비쌉니다. 지방은 훨씬 싸요”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그 말을 들은 처가 “그러면 우리도 대전이나 광주에서 살까요”라고 받았다. 반 농담조였지만 반쯤은 진심인듯했다. 그러나 우리 처지로서는 그럴 수가 없다.
이어서 대전에서 찾아준 지인에게 그 며칠 마음에 걸려 있던 의문을 털어놨다. “나는 세계 이곳 저곳을 자주 여행합니다만, 어디에 가든 홈리스(거리에서 사는 집없는 사람) 모습을 발견합니다. 그런데 서울에서는 별로 보이지 않아요. 한국이 풍족해졌다는 얘긴가요?” “천만에요.” 지인은 마치 나의 무지를 나무라듯 말했다. “서울역 지하도에 가 보세요. 이 추운 날에 많은 홈리스들이 자고 있을 테니. 교외나 지방에 가면 가난한 사람들을 얼마든지 볼 수 있어요.”
* 새해가 돼서 일본에 돌아왔다. K시의 역에 내리자 역 앞 길에서 빨간 모자를 슨 자그마한 노인이 잡지를 팔고 있었다. 처는 서둘러 다가가더니 잡지 5권 정도를 사면서 친밀하게 말을 걸기 시작했다. 나는 몇 걸음 떨어진 곳에서 두 사람이 대화하는 모습을 지켜봤다. 노인은 이름이 가토라고 했다. 그가 팔고 있던 것은 <빅 이슈(The Big Issue)>라는 잡지다. 원래 1991년 런던에서 창간됐다. 일반잡지와는 달리 홈리스의 자립을 지원하는 사업으로 시작됐다. 200엔짜리 잡지를 한 권 팔 때마다 110엔(약 1000원)이 판매자 수입으로 남는다고 한다. <빅 이슈> 제33호(2005년 8월15일)에 가토씨 인터뷰 기사가 실렸다. 기사에 따르면, 그가 K시를 판매장소로 선택한 이유는 더 큰 번화가 역에서는 흔히 취객에게 시달리기 때문이다. 경쟁사회의 스트레스를 온몸에 받고 있는 직장인들은 자신보다 약한 처지의 사람들을 이지메(해코지·구박)하며 스트레스를 푼다. 그런 점에서 K시 사람들은 가토씨에겐 친절한 모양이다. 인터뷰에 “이 나이에 여성한테서 편지를 받거나 벤또(도시락)를 받기도 해서 행복합니다”라고 한 그의 말이 나와 있었는데, 내 처도 그런 여성들 가운데 한사람이다. 하지만 나 자신은 아직 그와 터놓고 지내는 사이가 되지 못했다. 가토씨는 왼쪽 발에 붕대를 감고 있었다. 처가 걱정하며 묻자 오래된 상처가 곪아서 병원에서 치료를 받았다고 한다. 그때 병원의 한 방에서 재워준 모양인데, “역시 실내여선지 오랜만에 푹 잤다”고 했다. 언제나 공원 미끄럼틀 밑이 그의 잠자리였던 것이다. “우리는 올 봄부터 2년 정도 한국 서울에서 살기로 했어요”라고 처가 말하자 가토씨는 약간 쓸쓸한듯 웃으며, “호, 2년간이나…. 나는 그렇게까지 오래 살진 못할거요”라고 말을 흐렸다. 정직하게 말하면 나라는 인간은 자선활동이나 선행을 순수하게 받아들이지 못하는 성격이다. 한사람의 홈리스를 친절하게 대했다 한들 이 무자비한 경쟁사회 그 자체를 어떻게든 하지 않는 한 무의미할 것이다. 어릴 때부터 이 사회의 모순을 근본적으로 극복하지 않으면 소용없다고 생각해왔다. 그런데 지금도 나는 지극히 무력하다. 자선이나 선행 따위는 그런 죄의식이 깊이 밴 무력감으로부터 눈을 돌리기 위한 위선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이런 생각도 든다. 처가 가토라는 사람과 친구사이가 된 덕택으로 내게 홈리스라는 존재는 추상적인 개념에서 구체적인 인물상으로 바뀌었다. 밤이 차가와지고 눈이라도 내리기 시작하면 우리 부부는 편치않은 기분이 된다. 공원에서 자고 있는 그가 자꾸 마음에 걸리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때마다 나는 자신의 무력감을 느낀다. 이것은 유쾌한 일이 못된다. 그러나 피해서는 안되는 일이다. 이 시대에 그래도 인간답게 살아가려 한다면. 가토라는 구체적인 존재가 자칫 감아버리려는 내 눈을 열어주었다. 서울에서 가난 때문에 고통받는 사람들의 모습이 눈에 띄지 않았던 것은 내 행동반경이 좁았기 때문이라기보다는 마음의 눈이 닫혀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번역 한승동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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