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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랙 아테나
마틴 버낼 지음. 오흥식 옮김. 소나무 펴냄. 3만원 |
‘그리스 문명의 모태는 이집트’ 17세기까진 상식
19세기 유럽인종주의자 아리안 작품으로 바꿔치기
‘사료 비평’이란 이름 아래 증언자료 폐기 날조
유럽의 문화적 오만 일침 서양사 근본 전복
19년 전 서양사학계를 술렁이게 한 뒤 지금까지 집필작업이 계속되고 있는 ‘그리스 역사 바로보기’ 연작 <블랙 아테나>(소나무 펴냄) 제1권에는 ‘날조된 고대 그리스, 1785-1985’라는 부제가 붙어 있다. 부제도 그렇거니와 책 제목부터가 몹시 도발적이다. 아테나는 그리스문명 그 자체를 상징하는 도시국가 아테네와 그 도시의 수호신인 전쟁과 지혜의 여신 아테나를 가리킨다. ‘검은’ 아테나. 북아프리카와 중동지역 언어까지 두루 섭렵한 저자 마틴 버낼 미 코넬대 명예교수는 아테나가 이집트어 ‘헤트 네트(네트 또는 네이트의 신전, 집)’에서 유래했다는 걸 자세히 규명한 뒤 “(두 말간의) 음성학적 일치가 적절한 정도라면, 의미론적 일치는 완벽하다”고 단언한다.
대리석에 새겨진, 우리가 쉽게 떠올리는 전형적인 유럽 백인 형상의 아테나가 아니라 검은 피부의 아프리카인 아테나, 또는 ‘검은 대륙’ 아프리카인들이 건설한 아테나는 그리스문명 나아가 서양사 전체에 대한 기존 관념을 완전히 뒤엎는다. 저자가 토머스 쿤의 <과학혁명의 구조>에 나오는 패러다임 전환 구절을 인용하며 서론을 시작한 것은 바로 그걸 노리겠다고 선언한 셈이다. <블랙 아테나>를 쓰는 ‘정치적 목적’이 “유럽의 문화적 오만을 줄이는 것”이라고 아예 천명해놓고 있기도 하다.
“만약 아리안 모델을 전복하고 수정 고대 모델로 대체하자는 나의 주장이 옳다면, 이는 ‘서양문명’의 근본적인 기반을 다시 생각해야 한다는 것이 된다. 뿐만 아니라 우리가 행한 모든 역사 연구와 역사철학이 인종주의와 ‘유럽 쇼비니즘’에 물들었음을 인정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고대 모델은 주요한 ‘내재적’ 결함도 없으며, 설득력이 약하지도 않다. 그런데도 외재적 이유로 폐기당했다. 유럽의 축소판이자 순수한 유년기로 여겨진 그리스가 원주민(유럽인)과 식민자(아프리카인 및 셈족)의 혼합에서 비롯됐다는 사실은, 18-19세기의 낭만주의자와 인종주의자로서는 도저히 참을 수 없는 일이었다. 따라서 고대 모델을 좀더 마음에 드는 다른 모델로 대체해야만 했다.”
아르고스와 테베 등을 식민지배하며 그리스문명을 일군 주역은 아프리카인(이집트인) 및 셈족(페니키아인)이었는데, 유럽 낭만주의자와 인종주의자들이 이 멀쩡한 ‘고대 모델’을 폐기처분하고 그걸 뒤집어놓은 ‘아리안 모델’로 바꿔치기 해놨다는 얘기다. 말하자면 우리가 상식적으로 알고 있는 ‘아리안 모델’적 그리스문명은 19세기 유럽의 발명품인 것이다.
지혜여신 ‘아테나’ 이집트어에서 유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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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전 7세기 전반에 제작된 것으로 보이는 아르고스 헤라이온 출토 청동판. 클리템네스트라(왼쪽)가 칼로 카산드라를 살해하는 장면을 새겨넣었다. <한겨레>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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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17세기 무렵부터 사정이 달라진다. 17세기 말 뉴턴의 친구 리처드 벤틀리 등이 계몽주의를 공격한 이래 기독교쪽의 반발과 과거를 낮춰보는 ‘진보’관념의 대두, 백인 우월 인종주의, 낭만주의적 헬레니즘의 성장 속에 조직적인 대응이 이뤄졌다. 1734년 영국 국왕 조지 2세가 세운 독일 괴팅겐대학 같은 곳이 주역을 담당했다. 몽테스키외와 존 로크, 데이비드 흄, 벤저민 프랭클린, 장자크 루소 등도 인종주의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나중에 나치가 인종론 창시자로 추앙한 인류학자 마이너스의 ‘사료 비평’도 그 무렵 등장했다. 사료 비평이란, 역사적 자료를 기록자가 살던 시대의 정신을 고려해서 그 가치를 평가한 뒤 취사선택해서 해석기반으로 삼는다는 것인데, 실증주의라는 학문적 외피를 쓴 이 사이비 장치는 결과적으로 마음에 들지 않는 고대의 자료들을 마음대로 죽이고 날조할 수 있는 도구로 악용됐다. 유럽 백인 선민의식에 찌든 자들은 그리스 문명의 모태가 이집트 문명임을 증언하는 그리스인들의 숱한 기록과 신화들을 대부분 신빙성 없다며 폐기처분했다. 버낼의 작업은 바로 이들 버려진 자료와 신화들이 사실에 근거를 둔 것임을 입증해내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나폴레옹 몰락 직후 4국동맹과 신성동맹이 주축이 된 보수반동의 빈체제는 혁명에 반대하고 군주제를 정당화하면서 자유주의와 민족주의 운동을 억압했다. 유럽 지배계급은 기독교적 정치질서로 돌아갈 수도 없고 혁명적 민중노선을 받아들일 수도 없는 상황에서 그리스 고전연구를 사회통합과 현상유지를 위한 새로운 이데올로기로 채택했다. 유럽 제국주의 정당화 도구 1815-1830년간에 독일 고대학과 영국 고전학이 정립되면서 오늘날까지 이어진 백인 유럽 중심주의가 완성됐으며 고대 모델은 패배했다. 유럽 고전학이 완성한 아리안 모델은 그 시대 수많은 민족과 지역, 문화를 무자비하게 유린, 파괴했던 제국주의 유럽의 범죄적 약탈행위를 변명하고 정당화하는데도 안성마춤이었다. 칼 마르크스조차 오로지 그리스에서만이 개인이 공동체와 연결된 탯줄을 잘라내고 유적 존재에서 정치적 동물·폴리스 거주자로 변화했다며, 그리스문명의 모든 측면이 선행하는 모든 것과 범주적으로 다르다(우월하다)고 주장했다. 2차대전 유대인 학살과 1948년 이스라엘 건국 뒤 기원전 14, 13세기 우가리트에서 기록된 가나안어 신화 등의 연구를 통해 그리스문명에 셈족의 페니키아·히브리 문화가 준 영향이 명백해지면서 그쪽은 어느정도 ‘복권’됐으나 이집트는 여전히 소외돼 있다. “유럽(서양)의 문화적 오만”은 여전하다. 한승동 선임기자 sdh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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