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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6.01.19 19:52 수정 : 2006.01.20 15:32

전염병의 세균원인설을 굳건히 세우고 미래의 생물학적 예방법의 기초를 다져놓은 등의 업적으로 살아있을 때부터 ‘최고과학자’로 불린 파스퇴르의 초상화. 그는 뛰어난 연구자이면서 자신의 업적을 세상에 과시하는 데도 일가견이 있었다.

포도주 발효 연구하다 세균설 위업
탄저병 예방법 공개시연으로 명성
대중·언론·권력자 능란하게 활용해
‘허풍쟁이·정치꾼’ 비난도 있었지만
반과학적 행위 벌이지 않고 역사 ‘우뚝’

의학속 사상/(14) 세균학 개척한 루이 파스퇴르

오랜 기간 인류를 괴롭혀 온 전염병의 퇴치와 관련해 우리는 제너, 젬멜바이스, 리스터 등 수많은 의사와 의학자의 이름을 꼽을 수 있다.

이제 우리나라를 비롯해 대부분의 근대적 산업국가에서는 전염병이 보건의료상의 가장 큰 문제가 아니게 됐으므로 그들의 업적이 별로 실감나지 않을 수도 있지만, 불과 한두 세대 전만 하더라도 전염병이 이환과 사망의 가장 큰 원인이었음을 생각할 때 그들 의사와 의학자들의 업적을 소홀히 할 수는 없다. 물론 전염병이 퇴치되고 극복된 데에는 영양과 주거·작업환경 등의 개선이라는 사회경제적 요인이 좁은 의미의 의학보다 더 큰 기여를 하였다고 평가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이 ‘역사 속의 명의들’과 ‘무명의 의료인들’의 노력과 성과를 과소평가할 이유는 없는 것이다. 또한 현대에 들어 의학과 의사의 권위가 높아지게 된 데에는 세균학의 기여가 커다란 구실을 한 측면도 지나칠 수 없다.

그러한 의학자들 가운데에서도 역사에서 우뚝 선 사람이 루이 파스퇴르(Louis Pasteur, 1822~1895년)이다. 파스퇴르의 기념비적인 업적들 가운데 몇 가지만 든다면, 자연발생론을 완전히 굴복시켰고, 전염병의 세균원인설을 굳건히 세웠으며, 젬멜바이스와 리스터가 사용한 무균 및 살균법의 효력을 증명했고, 미래의 생물학적 예방법의 기초를 다져 놓았다.

화학 교육을 받은 파스퇴르(좁은 의미로는 의사가 아니었다)는 오히려 생물학적 현상에 더 관심을 가져 인접 과학 사이의 상호 교류라는 점에서도 새로운 모범이 됐다. 파스퇴르는 1854년 릴대학에서 교수 생활을 시작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관찰의 세계에서는 준비된 마음만이 기회를 잡을 수 있다.” 그리고 바로 그 자신이 이 금언의 좋은 본보기가 됐다.

파스퇴르의 초기 연구는 입체화학에 대한 것이었는데 그는 각각의 결정상에서 세균이 다르게 행동한다는 사실을 관찰하고는 이 사실을 지역 양조업자로부터 문의받은 포도주 발효에 대한 연구에 적용시켰다. 그 결과는 양조 과정의 난점을 해결했을 뿐 아니라, 마침내 세균설로 개화하게 됐다. 그는 곧 현미경으로만 볼 수 있는 미생물이 발효의 원인이라는 사실을 밝혀냈으며, 포도주를 몇초 동안 60도 정도로 가열함으로써 포도주를 산화시키는 세균을 죽이는 방법(저온살균법)도 개발했다.


전세계 누에산업 구해내

또 누에의 전염병이 섬유산업을 위협할 지경에 이르렀을 때, 파스퇴르는 거기에 두 가지 질병이 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미립자병은 누에 알이 감염됨으로써 생기며, 연화병은 누에 창자 속에 세균이 번식함으로써 생긴다는 것이었다. 감염된 알을 솎아내고 누에의 먹이를 바꿈으로써 프랑스뿐 아니라 전세계의 누에 산업이 구원을 받게 됐다.

파스퇴르는 그 뒤 갑자기 뇌일혈로 고생하게 됐고 회복했을 때에도 발음이 느리고 불분명한 등 후유증이 심했다. 그는 이미 쌓아 올린 업적만으로도 역사상 가장 위대한 과학자의 반열에 들게 될 정도였으므로, 또 다른 일을 시작하기 전에 충분한 휴식을 가질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 시기에 그의 가장 유명하고 가치 있는 공헌이 막 나타나려 하고 있었다.

파스퇴르의 다음 연구는 탄저병이라고 불리는, 양의 치명적인 질병에 관한 것이었다. 그는 탄저병균을 분리함으로써 코흐(Robert Koch, 1843~1910년)의 선구자가 됐으나 아직 그것을 치료하고 예방하는 방법은 알 수 없었다. 그러므로 그가 많은 양계업자의 애를 태우던 닭콜레라를 연구하도록 위촉받았을 때만 해도 그의 연구가 탄저병의 예방, 나아가 예방의학에 혁명을 일으키는 방법을 만들어내리라고는 전혀 예상할 수 없었다.

정부 등의 지원을 받아 설립한 파스퇴르 연구소.
그는 휴가에서 돌아와 떠나기 전에 준비했던 닭콜레라 배양균을 건강한 닭에 주사해 보고 병을 일으키지 않는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이어서 신선한 닭콜레라균을 주사해도 그 닭은 병에 걸리지 않았다. 이러한 지식을 바탕으로 파스퇴르는 탄저병균을 다양한 방법으로 다룰 수 있었다. 결국 병원균을 적당한 온도 범위 안에서 배양하면, 그것에 감염된 동물은 그 병에 대한 저항력은 생기지만 병에는 걸리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1881년 멜룬 지방 농민회는 이 발견의 유효성을 확인하기 위해 대중 시연의 자리를 마련했다. 파스퇴르는 의사, 수의사, 기자들과 여러 호사가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보통 양들과 미리 해가 없게끔 만들어놓은 균을 접종 받은 적이 있는 양들에게 병원성이 있는 균을 주입했다. 며칠이 지나자 무방비 상태의 양은 모두 죽었고 미리 조처를 취했던 양은 모두 건강하게 살아남아 있었다. 이리하여 면역의 원리는 공개적으로 그리고 드라마틱하게 공인을 받게 된 것이다. 한 세기쯤 전 제너가 우두를 접종해 비슷한 결과를 얻었지만, 파스퇴르는 약독화한 균체가 그 균이 일으키는 질병에 대한 면역력을 심어 준다는 근본적인 원리를 확립했다.

광견병(공수병)의 ‘독’이 감염된 동물의 침에 존재한다는 사실은 이미 알려져 있었지만, 파스퇴르는 병의 증상으로부터 그 독이 중추신경계를 침범할 것이라는 추론을 했다. 그는 토끼의 척수를 가지고 자신의 생각을 확인한 뒤, 탄저병균의 백신을 만들며 얻은 지식을 활용해 병원성 있는 광견병균을 무해한 형태로 만드는 방법을 발전시켰다. 그는 점점 더 독성이 강한 추출물을 주입해 토끼를 보호할 수 있는 방법을 개발하면서 이를 인간에게 적용할 기회를 기다렸다.

1885년 조셉 마이스터라는, 개에 물린 소년이 그를 찾아왔다. 파스퇴르는 우선 두명의 의사한테서 소년이 가망이 없다는 진단서를 받아뒀다. 효과와 부작용이 충분히 확인되지 않은 위험한 처방을 사용한다는 일은 생각할 수도 없는 오늘날(최근의 ‘줄기세포’ 관련 보도를 보면 반드시 그렇지만도 아닌 듯하다) 파스퇴르의 이러한 조심성을 잘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파스퇴르는 밀고나갔다. 주사의 병원성이 점점 강해질수록 광견병의 증상이 나타날 것으로 예상하면서 마음 졸이며 지켜보았는데 이는 3~6주 안에 나타날 것이었다. 토끼에게 치명적인 정도의 추출물을 주사한 뒤에도 소년이 건강하자 파스퇴르는 자신의 가설과 실험이 옳았음을 알게 됐다. 광견병항독소의 성공은 파스퇴르에게 대단한 명성을 가져다줬는데, 이는 파스퇴르의 면역방법이 처음으로 인체에 적용된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살아있을 때부터 ‘최고과학자’

그때부터 미생물학과 면역학은 점점 더 영역을 넓혀 가서,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많은 병원균이 발견됐고 수많은 백신과 항혈청이 생산됐으며 차츰 예방 기전이 밝혀지게 됐다. 이러한 업적들로 파스퇴르는 살아 있을 때부터 ‘최고과학자’, ‘현대의학의 아버지’, ‘인류의 은인’ 등으로 불렸다. 하지만 파스퇴르의 공을 아무리 높게 평가하더라도 수많은 사람들의 노력으로 식주의(食住衣) 생활이 개선됨으로써 인간의 건강이 나아지고 수명이 늘어난 점에 견주면 “드넓은 바다 앞에서 조약돌 한 개를 손에 쥔” 정도일 뿐이다.

파스퇴르는 뛰어난 연구자이면서 자신의 업적을 세상에 과시하는 데에도 일가견이 있었다. 1881년의 탄저병 대중 시연에서 보듯이 파스퇴르는 대중과 언론, 그리고 권력자들을 능란하게 활용했다. 1886년 프랑스뿐만 아니라 유럽 여러 나라 정부와 민간단체들의 지원을 받아 파스퇴르연구소를 설립하고 스스로 연구소장으로 취임한 데에도 파스퇴르의 연구능력뿐만 아니라 정치력이 적지 않게 작용했다. 그런 점을 두고 당시에도 파스퇴르를 허풍쟁이나 모리배, 정치꾼이라고 비난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또한 파스퇴르 업적의 적지 않은 부분이 다른 사람의 것을 가로채거나 베낀 것이라는 비판도 있지만 연구결과를 날조하거나 심지어 없는 것을 있다고 하는 따위의 반과학적 사기 행위를 하지는 않았다.

황상익/서울대 교수·의사학
“과학에는 국경이 없지만 과학자에게는 조국이 있다.” 요즈음 항간에 널리 회자되는 말이다. 사실인지 확실하지 않지만, 그 말은 1870년에 프로이센이 프랑스를 침략(보불전쟁)했을 때 거의 50살에 이른 파스퇴르가 민병대에 자원하면서 했다고 알려져 있다. 나이와 건강 때문에 거부될 것을 잘 알고 있던 파스퇴르가 인기를 위해 쇼를 한 것이라고도 하지만 이 또한 밝히기 쉽지 않은 점이다. 하지만 우리는 과학정신에 비춰 이렇게 말할 수 있다. “과학자의 조국은 진실과 정직이다.” 또한 진정한 과학자라면 프랑스 역사학자 마르크 블로흐처럼 침략에 맞서 총을 들지만, 정당하지 않은 전쟁이나 경쟁에 ‘국익’이나 ‘국가’의 이름으로 어떠한 힘도 보태지 않을 것이다.

hwangsi@sn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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