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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9살의 베브(오른쪽)와 62살의 제리가 엄청난 무게를 끌고 대륙분기선을 따라 미국 종단 여행을 하고 있다. 이 코스는 비포장도로인 산길로 주로 가기 때문에 힘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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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은택의 아메리카 자전거여행 (35)
처음에 왜 ‘bicycle’을 자전거라고 번역했는지 짐작할 수 있을 것 같다. 말이나 소가 끌지 않는데도 움직이기 때문이다. 일본에서도 지텐샤(자전차)라고 하고 중국에서도 지싱처(자행차)라고 한다. 하지만 틀린 말이다. 자전거는 저절로 굴러가지 않는다. 페달을 밟아야 간다. 그래서 인력거라는 말이 더 어울리지만 인력거는 이미 사람들이 끄는 수레를 지칭하는 말로 굳어졌다. 더구나 인력거는 다른 사람이나 짐을 싣고 가지만 자전거는 싣고 가는 게 다름 아닌 자신이다. 그럼, 자신거라는 표현은 어떨까. 하지만 자동차도 자신을 싣고 간다. 그래서 내가 제안하는 단어는 몸수레다. 팔다리, 어깨, 허리, 이두박근, 엄지발가락 등 온 몸을 써서 끌고 가는 동시에 자신의 몸을 싣고 가는 수레이기 때문이다.
때로는 자전거라는 말이 맞다. 저절로 간다. 로키 산맥의 후지어 패스를 넘고 난 길이 그랬다. ‘ㄹ’ 자로 꺾어지는 가파른 내리막 길의 연속이어서 한번 기분 내다 평생 먼저 가는 일이 없도록, 달리 말해서, 공중으로 날라가지 않도록 브레이크 핸들을 꽉 쥐어야 했다. 너무 오래 꽉 쥐고 있어 손바닥이 얼얼하고 땀이 났다. 경치를 완상할 여유가 없다. 그런데 페달을 밟을 필요는 없었다. 영어로 switchback이라고 부르는 예각의 내리막길이 곧 끝나고 도로공법의 승리인 경사각 8% 이하의 편안한 내리막길이 나오기 시작하는데 무려 100㎞를 흘러 내려갔다. 옆으로는 블루 리버가 흐른다. 흰 거품을 일으키며 내려가는 검푸른 강물과 내 몸수레는 앞서거니 뒤서거니 경주를 벌였다.
북쪽으로 갈수록 손타지 않은 광대한 대지
이대로 고꾸라져도
아무말 없을 아득한 절대 세계
굽이굽이 태초로 들어간다
미국에서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스키 리조트인 브레켄리지(Breckenridge)에 이르자 갑자기 자전거 타는 사람들이 넘쳐난다. 예전 여의도 5.16 광장의 자전거 군중 속으로 휩쓸려 들어간 느낌이다. 브레켄리지에서 실버손(Silverthorne)까지는 34㎞ 길이의 자전거 전용로가 숲 속으로 나 있어 너도나도 자전거를 탄다.
내리막길 100km 강과 경주
브레켄리지는 미국이 정복 전쟁과 부동산 투기로 정신 없이 땅을 주워담다가 뒤에 흘린 땅이었다. 브레켄리지와 이른바 미들 파크(Middle Park)에 속하는 주민들은 미국이 프랑스, 스페인 등과 체결한 영토 협정에 자신들이 누락돼 있는 것을 뒤늦게 알았고 1936년에야 콜로라도 주의 일부로 편입하는 의식을 거행했다고 한다. 만약 내가 그 주민들 중의 한 명이라면 서운해서라도 편입을 거부하고 독립국을 세우자고 했을 것 같다.
경치는 북쪽으로 올라갈수록 더욱 거칠고 헐벗었다. 황무지의 원형을 보는 것 같다. 그런데 무정한 황무지가 왜 이토록 아름답게 느껴지는 것일까. 그리고 이 황무지를 혼자 가는 게 왜 더 이상 외롭지 않을까. 캔자스에서 만난 한 농부는 콜로라도에 갔더니 경작할 수 없는, 쓸모없는 땅만 잔뜩 있더라고 말한 적이 있었다. 내게는 인간의 손이 미칠 수 없는 광대한 대지가 있다는 깨달음을 준다. 나를 미물로 만드는, 그래서 내가 하찮은 존재가 되는 게 아니라 작더라도 이렇게 광활한 우주에 속해 있다는 명징한 세계인식을 주고 있기 때문에 아름다운 게 아닐까. 이대로 고꾸라져 죽어도 아무 말이 필요 없는 그런 아득한, 비인간적인 세계. 그런 절대 세계를 목격하고 있으니 인간 세계에 대한 동경에서 자유로운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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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스턴 근처의 윈체스터에서 온 칩(왼쪽)과 캐티 부부는 집을 팔아서 은행에 넣어두고 그 이자로 미국횡단 여행을 하고 있다. 사진에서 “자전거 타는 사람들과 애완동물도 (숙박해도) 괜찮다”고 잘못 읽을 여지가 있는 라운드업 모텔의 간판을 캐티가 장난스럽게 가리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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굽이굽이 돌 때마다 새로운 전경이 펼쳐진다. 핫 설퍼 스프링스(Hot Sulphur Springs)로 들어가는 40번 길의 마지막 6㎞는 콜로라도 강을 거슬러 황토 빛 계곡 속으로 몇 겹의 문을 열고 들어가는 것과 같았다.
그러나 핫 설퍼 스프링스의 시립 공원에서는 불편한 일박을 했다. 지금까지 야영한 곳 중에서는 최악의 모기떼의 습격이 있었고 세수하기 위해 들어간 콜로라도 강은 물살만 빨랐지, 미적지근했다. 송어들도 물이 찬 상류로 올라가버려 플라이 낚시하는 사람들은 더위를 불평했다. 이곳에는 유황온천이 있어서 역시 단체 목욕 온 동양 사람들이 눈에 띄었다. 제7 안식일 한인 덴버교회 승합차로 온 한국사람들이 유황온천 앞 공원에서 고기를 구워먹는 모습을, 모락모락 김나는 식당 안을 들여다 보는 집 없는 소년처럼, 군침을 삼키며 지켜봤다. 부근에 있는 텐트들에서는 어디서 술을 마셨는지 밤늦게 와서는 모닥불을 피우고 새벽까지 떠들어댔다.
아침에 40번 길을 따라 가다가 좌회전, 125번으로 꺾어지면서 다시 오르막이 시작됐다. 콜로라도 강과도 거기서 작별했다. 이 강은 남쪽으로 내려가면서 길이 347㎞와 폭 최장 32㎞의 심곡인 그랜드 캐년을 파놓고 지나가는데 여기서는 강폭 몇m 밖에 안 되는 시냇물이다. 40번을 타고 좀 더 올라가면 강의 시작을 볼 수 있을텐데….
125번 길은 우주 생성의 비밀을 풀어가는 것처럼 더욱 더 태초의 느낌이 들었다. 차도 거의 안 다닌다. 트랜스 아메리카 트레일에서 세 번째로 높은 높이 2886m의 윌로 크릭 패스(Willow Creek Pass)를 지나간다. 랜드(Rand)를 거쳐 월든(Walden)으로 가는 길은 노스 파크(North Park)라고 불리는 광야. 나는 지금 앨리슨의 말대로 우주여행을 하고 있다.
이틀 동안 대조적인 장수만세의 부부 라이더들을 만났다. 먼저 만난 블랜차드(Blanchard) 부부. 그들은 내가 이틀 전에 넘은 후지어 패스를 향하고 있었다. 워싱턴 주 올림피아에서 왔는데 부인 베브는 69살이라고 해서 놀랐다. 남편 제리는 62살이니까 평균 연령 65.6살의 커플이다. 제리는 아직도 중학교 수위로 일하고 있고 베브는 1년 8개월 전까지도 보험회사에서 소비자 전화상담원으로 일했다. 그러니까 돈이 있어서 늘그막까지 레저를 즐기는 게 아니다.
그들은 언제나 여유가 있었다. 29년 전인 76년 미 건국 2백주년을 기념해 트랜스 아메리카 트레일을 따라 미국을 횡단한 2천여 명에 끼었다. 오리건 주 아스토리아에서 출발, 버지니아 주 요크타운까지 갔는데 베브는 15, 16살이던 아들 둘과 12살이던 딸을 데리고 갔다. 13명이었던 일행 중에서 최연장자는 68살의 여성이었다고 한다. 그 때 제리는 베브의 남편이 아니라 남편의 친구였다. 제리는 친구가 먼저 세상을 뜨자 일곱 살 연상의 베브와 결혼했다.
그들은 사우전드 트레일스라는 회원제 캠프장 회사에서 함께 일했었다. 그런 뒤 베브는 마운트 레이니어(Mt. Rainier) 국립공원의 공원경찰로 일했는데 그때를 가장 행복했던 시기로 기억한다. 공원경찰은 자연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는 이상적인 직업이다. 베브는 돈을 많이 버는 대신 몸을 많이 써왔다. 뛰고 걷고 자전거 타고….
나는 지금 우주여행을 하고 있다
마라톤을 좋아했던 그는 몇 년 전 달리기 포기라는 어려운 결정을 내렸다. 무릎에 무리라는 신호가 왔고 무엇보다 계속 달리다가는 제일 좋아하는 등산까지 못하게 될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다. 그는 올해도 열흘 동안 산 속에서 지내다 돌아왔다. 지금은 미국 종단 여행을 하고 있는 중. 미국 종단 코스 중에서 가장 힘들다고 하는 컨티넨탈 디바이드 트레일(미국 대륙 분기선)을 따라 남하하고 있다. 이 트레일은 캐나다에서 멕시코까지 로키 산맥을 따라가는데 비포장도로의 산길이 대부분이어서 포장도로를 주행하는 것보다 몇 배 더 힘들다. 그들은 제리가 일하기 때문에 한번에 종주하지 않고 매년 여름 휴가에 맞춰 구간구간 나눠서 여행한다. 올해는 와이오밍 주 롤링스(Rawlings)에서 출발해 뉴 멕시코 주까지 갈 예정.
나는 그렇게 많은 짐들을 끌고 가는 사람들은 처음 봤다. 제리는 모텔에서 자지 않고 야영하기 때문에 6일치의 식량을 한꺼번에 넣어가지고 다닌다고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평소에 돈보다 몸을 더 소중히 한 결과 만년 청춘을 누리고 있다. 나도 69살이 돼서 그들과 같은 모험을 떠날 수 있을까.
다음 날에는 그들과 정반대 성향의 60대 부부를 마주쳤다. 월든에 도착, 한 모텔에 사이클복이 빨래로 널려 있는 것을 보고 주저 없이 이 모텔에 투숙하기로 했다. 레스비언인 여주인은 시원한 맥주 한 병을 선사했고 자신의 사무실에서 인터넷을 쓸 수 있도록 배려해줬다. 자전거를 방 안으로 집어넣으려고 낑낑대고 있는데 사이클복의 임자가 나타났다. 칩(Chip)이라고 했다. 은퇴 운운해서 나이를 물어보자 61살이라고 밝히는데 믿을 수가 없었다. 부인 캐티(Kathy) 역시 동갑인데 더 믿기 어려울 정도로 젊어 보인다. 두 사람은 야생적인 베브와 제리와는 달리 헬스클럽 형이다. 매사추세츠 주 보스턴 근처에 있는 윈체스터(Winchester) 출신이어서 한결 동부의 세련된 도회지 분위기를 풍겼다. 부인 캐티는 자신이 다니던 생명공학 회사가 합병되면서 자리가 없어지자 넉넉하게 보상 받는 것을 기화로 은퇴해버렸다. 칩은 부동산금융회사에 다니면서 돈을 모아 캐티와 동반 은퇴했다.
노부부 두쌍을 만났다
한쌍은 돈은 없어도…
뛰고 걷고 자전거 타고…
아영만으로 험로 종단
한쌍은 돈 모아 호사 여행
둘다 존경스럽다
돈이 있으나 없으나
그 나이에 떠난다는 게
그들은 집을 처분한 돈을 은행에 넣고 거기서 나오는 이자로 여행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텐트를 가져왔으나 아직 한번도 치지 않았다고 말하는 것으로 봐서 이자, 아니 원금이 상당한 액수로 추정된다. 그들은 두 아이들이 사는 샌프란시스코까지 자전거를 타고 가서 거기서 살 집을 구할 예정이라고 했다. 여기까지 오는데 남보다 훨씬 느린 두 달 보름 걸렸지만 서두를 이유가 하나도 없다. 그들이 유한계급의 사치를 누리고 있다고 할 수 있을까. 나는 그렇지 않다고 본다. 미국 횡단 자전거 여행은 물질적 풍요를 누리는 사람일수록 떠나기 어려운 여행이다. 그런 점에서 나는 이들도 존경한다.
믿을 수 없이 젊은 노인
캐티가 까다로운 성격이었다. 숙박시설에는 반드시 수세식 화장실과 샤워 시설이 있어야 한다고 고집했다. 그런 야영장을 찾기가 쉽지 않으니 여관에서만 자게 된다. 누가 먼저 이 여행을 제안했느냐고 물어봤다가 부부싸움을 촉발할 뻔 했다. 캐티는 “칩이 하자”고 했다고 원망조로 말했다. 칩이 “당신도 동의는 했잖아” 라고 말을 받긴 했는데 기가 약했다. 힘든 고개를 넘을 때마다 부인한테 “왜 이 고생을 사서 하느냐”는 닦달을 받아온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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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은택/〈블루 아메리카를 찾아서〉의 저자 hongdongzi@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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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사람은 다음 날 몇 시에 출발할지를 놓고 또 한판 붙었다. 캐티는 아침 5시 반, 칩은 6시. 큰 차이는 아니다. 내가 아침에는 추워서 일찍 출발할 이유가 없다고 거들자 칩은 힘을 얻어 “봐, 도대체 왜 일찍 출발하자는 거야” 라고 캐티에 도전했다. 캐티는 점심 식사를 다음 행선지인 리버사이드(Riverside)에서 하려 하기 때문이라고 일축했다. 그러면서 캐티는 자기가 칩보다 생일이 몇 달 빠르다는 것을 강조했다. 22살에 결혼, 39년을 함께 살아와 상대방에 대한 전력파악은 끝난 지 오래다. 칩은 말대꾸하지 않았다.
아침에 밖에서 그들이 출발하는 소리에 잠이 깼다. 시계를 보니 6시였다. 결국 칩이 주장한 그 시간이었다. 웃음이 나왔다. 이들은 며칠 뒤 다시 전혀 생각할 수 없는 곳에서 다시 상봉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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