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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찬호/한양대 강의교수·문화인류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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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명 발달하면서 똥은 아킬레스건
중국 전체가 수세식으로 바뀐다면
감당못할 사태 맞을지 모른다
녹색도시 만들려면 어떤 불편을 감수해야 할까
화장실에 앉아 고민해보자
생활 속의 문화사회학
“오늘도 화장실에서 줄을 서 있었더니, 어떤 아주머니가 ‘미안해요, 급해요~!’라고 줄을 무시하며 선두에 뛰어들었다. 곧장 모두가 ‘나도 급해요!’라는 살기 띤 얼굴로 바라봤는데, 그 아주머니는 이미 바지의 지퍼를 열어 속옷까지 보이는 상태였다. 아무도 그 결사적인 행동에는 이길 수 없고, 선두에 있는 나도 그만 기가 죽어 ‘네’하며 양보하고 말았다.” (다가미 요코 <새댁 요코짱의 한국살이> 중에서)
배설의 장애는 배고픔보다 고통스러울 수 있다. 공복(空腹)도 괴롭기는 하지만 그것은 때로 오히려 심신을 맑고 홀가분하게 해준다. 그에 비해 변비 증세는 기(氣)의 흐름을 경직시키면서 만사를 귀찮게 만든다. 또한 배변이 급한데 화장실을 찾지 못하면 발을 동동 구르게 되고 얼굴이 창백해진다. 해탈을 위해 정진하는 스님들도 화장실을 ‘해우소’라고 부를 만큼 그 근심은 심각하다.
그래서 재난이 생기면 화장실이 절박한 문제로 떠오른다. 미국 뉴올리언즈에서 수만 명의 수재민이 슈퍼돔에 대피했을 때 화장실의 상황은 끔찍했다고 전해진다. 1995년 일본 고베 대지진 때도 피난민 수용소에서 가장 절실했던 것은 화장실이었다. 도시 기능이 한꺼번에 붕괴해버린 상황에서 수세식 화장실은 무용지물이었기 때문이다. 재해 지역에 긴요한 음식과 침구는 공중에서 비행기로 떨어뜨려줄 수가 있지만, 똥은 하늘로 쏘아 올릴 수가 없다. 이 비가역성은 누구도 거역할 수 없는 생태학적 진실이다.
그러나 화장실은 생리적인 욕구만 해결하는 곳이 아니다. 문을 잠그고 변기에 앉으면 완전하게 자기 혼자만의 공간이 된다. 그 철저한 익명의 공간에서 이뤄지는 문화적 행위가 바로 낙서다. 공중화장실에서 발견된 낙서 몇 개를 보자. ‘긴급 속보! 이순신 사망!!’ 그 밑에 써 있는 글은 ‘알리지 말라 일렀거늘….’ 또 다음과 같이 차례로 쓰여 있는 것도 있다. ‘신은 죽었다 -니체 -’ / ‘너는 죽었다 - 신 -’ / ‘너희 둘 다 죽었다. - 청소부 아줌마 -’ 그렇다. 댓글 문화의 기원은 바로 화장실이다. 그리고 포르노가 대중화되기 전에 음란한 그림들이 활발하게 창작되고 유통된 것도 그곳이다. 화장실은 인터넷처럼 자기를 숨기고 온갖 욕망과 장난기 그리고 ‘개똥철학’을 마음껏 배설하고 소통하는 정보 공간이다.
그런데 인터넷과 달리 화장실은 철저한 남녀유별의 공간이다. 여성들은 남자보다 머무는 시간이 약간 더 긴데, 아직까지 대부분의 화장실에는 여성용 변기의 수가 남성용에 비해 적기 때문이다. 그리고 세면대 앞에서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화장을 고치 고치는데 꽤 시간이 걸린다. 거울을 통해 옆 사람의 얼굴을 힐끗힐끗 보아가며 자신의 용모를 추스르는 그곳은 과연 ‘화장실’이다. 그러나 같은 여성이면서도 남자화장실까지 드나들면서 하루 종일 청소를 해야 하는 아주머니들의 표정은 언제나 고단하다.
그렇게 열심히 청소를 하는데도 청결함을 유지하기가 어려운 곳이 화장실이다. 다행히 2002년 월드컵을 치르면서 화장실에 대한 집중적 개선이 이뤄졌다. 거의 호텔 수준으로 청결해진 공중화장실, 더 나아가 문화공간이라고 할 만큼 멋진 인테리어로 치장된 화장실도 곳곳에 생겨났다. 몇몇 지자체들은 이색적인 화장실을 명소로 내세우면서 장소 마케팅의 경쟁을 벌이기도 한다. 그러나 아직도 지극히 불결한 화장실이 많이 남아 있다. 휴지통이 바로 코앞에 놓여 있는데다가 거기에 휴지가 가득 넘쳐나는 것, 바닥에 흥건하게 물이 고여 있어 미끄럼 사고와 악취의 원인이 되는 것 등은 ‘관광 한국’에 어울리지 않는 풍경이다. 그 외에 시설과 물품의 관리에서도 좀 더 신경 써야 할 부분들이 많다.
인간에게 배설물 처리가 특별히 문제가 되는 까닭은 무엇인가. 정착생활과 높은 인구밀도 때문이다. 다른 동물들은 아무데나 배변해도 널리 돌아다닐 뿐 아니라, 서식지의 밀도가 낮기 때문에 자연 분해에 맡겨도 된다. 그에 비해 인간의 경우 문명이 탄생한 이후 배설은 심각한 과제로 부각되었다. 신석기 시대에 정착을 하기 시작했을 때, 그리고 근대 산업도시에 인구가 밀집하게 되면서 공중위생의 확보는 절실해졌다. 기원전 3000년경의 고대문명에서 이미 수세식이 등장했고, 현대적인 화장실은 유럽과 미국에서 19세기 중반에 출현했다. 그것이 한국에서는 일제시대 호텔과 백화점을 통해 보급되기 시작했다. 이제 거의 수세식으로 바뀐 우리의 화장실은 날로 청결해지고 있다. 달걀귀신 같은 것은 얼씬도 못한다. 그러나 정말로 청결해진 것일까. 화장실이 깨끗해질수록 지구는 점점 더러워진다. 가까운 일상 공간은 깔끔해졌지만, 그를 위해 엄청난 물을 소모해야 할 뿐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곳의 오염을 대가로 치러야 한다. 하수종말처리장에서 최종적으로 남은 분뇨 찌꺼기는 서해(西海)에 멀리 버려지는데, 현재는 그런대로 자연 정화가 되지만 앞으로 중국에서 수세식 화장실이 보편화되면 감당할 수 없는 사태를 맞을지 모른다. 쓰레기와 함께 똥은 현대문명의 아킬레스건이다. 변소(便所)는 편안(便安)해야 한다. ‘restroom'이라는 말처럼 몸뿐 아니라 마음도 느긋하게 머물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그 편안함이 지속가능한 것이 되기 위해서는 분뇨 처리의 시스템이 달라져야 한다. 조셉 젠킨스의 <똥 살리기 땅 살리기>를 보면 톱밥을 활용하여 인분을 위생적으로 퇴비화하는 방법을 제시하고 있는데, 그것으로 화학비료를 줄이면서 땅을 되살릴 수 있다. 그것이 거대한 도시에 어떻게 접목시킬 수 있을지 전문적인 연구가 필요할 것이다. 오랜 역사 속에서 똥은 자원이었다. 먹는 것과 싸는 것, 깨끗함과 더러움은 뫼비우스의 띠처럼 상보적으로 맞물려 있었다. 오늘의 문명은 몸과 자연의 순환을 어떻게 실현할 것인가. 화장실에 앉아서 골똘히 생각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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