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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6.01.26 19:48 수정 : 2006.02.06 15:33

유용주 시집 <은근살짝>

밥먹듯 굶던 유년의 생생한 기억
문학은 자고로 밑바닥서 비롯되거늘 어찌할꼬...
복부 비만의 저, 늙은 개 한마리

유용주(46)씨는 <한겨레>에 연재한 자전 소설 <마린을 찾아서>라든가 <문화방송> 에 추천도서로 선정된 산문집 <그러나 나는 살아가리라> 등의 작가로 독자들 사이에 잘 알려져 있다. 그러나 문단에서 그는 1991년 <창작과 비평>을 통해 등단한 뒤 두 권의 시집을 낸 시인으로 통한다. 두 번째 시집 <크나큰 침묵> 이후 그는 긴 호흡의 글쪽으로 방향을 틀어 소설과 산문에 주력해 왔다. 그러느라 시작(詩作)에는 다소 소홀했던 것이 사실인데, 이번에 10년 만에 세 번째 시집 <은근살짝>(시와시학사)을 묶어 내며 ‘시업 복귀’를 신고했다. 시인 자신은 “친정으로 돌아왔다”고 표현했다.

소설과 산문에서도 그러하지만, 유용주씨의 시들 역시 유년기의 가난의 체험에 닻을 내리고 있다. 시집 앞부분에 실린 시 <입동>은 유용주 문학의 밑자리를 아련하게 그려 보여준다.

“아무리 허리띠가 양식이라고 하지만 새벽별 눈꺼풀에서 떼어내고 쌀을 퍼담으면서 서럽기도 서러웠을 겁니다 아이들은 쑥쑥 자라 장리 빚은 늘어가고 쌀독은 어느새 바닥이 보이고//나 그때 어머니 나이 되어 새벽밥 지으면서 그 옛날 잠결에 듣던 어머니 쌀 푸는 소리, 항아리 밑을 긁는 바가지 소리, 서늘한 바람 몰아세운 뒤 문 이내 닫히고 문풍지 미세하게 떨리는 소리, 조금 있다가 타닥타닥 삭정이 튀면서 밥 퍼지는 냄새를 가물거리며 맡은 적 있습니다 배가 든든해야 덜 추운 법이라고… 도시락 보자기를 건네주시던…”(<입동> 전문)

10년 만에 ‘사업으로의 복귀’

어머니의 서러운 사랑을 양식 삼아 성장한 아이는 이내 집을 떠나고, 세상에서 그가 마주치는 것은 마찬가지의 가난과 배고픔에서 어머니의 사랑을 뺄셈했을 뿐인, 더욱 가혹한 상황이다. 시집의 도처에서 시인은 성장기에 겪은 극도의 허기를 쓰라리게 회고한다.

“창자는 늘 아우성이었어 위벽에 솜털 생기기 전부터 참지 못할 허기, 그냥 이끼라도 모래라도 뻘이라도 삼키고 싶은 날들이었어 아수라 화탕지옥 아귀나 될걸”(<구멍>)


“굶은 기억이 살찌게 하나/슬픔이 배부르게 하나/(…)//참는 것이 밥이었고/견디는 일이 국이었고/울며 걷던 길은 반찬으로 보였는데”(<배 나온 남자>)

인용한 시 <구멍>의 앞부분에서 시인은 “밑바닥만 핥고 살아왔어”라고 토로하거니와, 지옥 같은 허기의 세월을 통과해 온 체험에서 우러난 게 유용주씨 특유의 ‘바닥 문학론’이라 할 수 있겠다. 문학은 바닥에서 비롯되는 것이며, 적어도 바닥을 헤아리고 그에 관여하는 일이라는 믿음 말이다. 누추하고 더럽더라도 바닥이야말로 생의 정직한 얼굴이라는 것이 시인의 생각이다. “곰삭은 구린내와 정면으로 맞붙었더니” “세상 무서울 게 하나도 없다”(<봄바람과 싸웠다>)더라는 체험담은 그러한 생의 맨얼굴을 직시한 이만이 손에 넣을 수 있는 한 조각 진실의 발화일 터이다.

따라서 시인이 “감출 수 없는 그늘/숨길 수 없는 허기, 노예 근성, 쇤네 차림/호적등본 되어 따라다닌다/(…)/아직 내 몸은 온통 겹그늘이다”(<옴>)라며 짐짓 한탄조로 읊조릴 때에도 그는 알고 있다, “챙 넓은 그늘은, 어둠의 포자는 더 많은 알을 깐다”(<옴>)는 사실을. 같은 생각을 그는 이렇게도 표현한다: “쭉정이가 세상을 살린다/썩어 거름이 된다”(<참깨를 베면서>).

배고픈 기억·배부른 현실 사이

이렇듯 바닥에서 출발했고 의지적으로 바닥을 지향하려는 그에게 곤란한 고민이 생겼다. 뱃살이 그것이다. 뱃살이라니. 저 끔찍한 허기의 기억이 상기도 생생한데, 뱃살이란 웬 족보에도 없는 물건이란 말인가. 앞서 인용한 시 <배 나온 남자>에서 보듯 허기의 기억과 배 나온 현실 사이의 어처구니없는 괴리는 시인을 심한 자괴감에 빠뜨린다. 나온 배와 성인병을 걱정해 자신이 택한 식이요법을 소개하며 그가 ‘가소롭구나’라는 말을 앞세우는 것은 그 때문이다.

“가소롭구나,/현미밥이 어떻고 버섯과 청국장이 저쩌구 채소 위주의 식단에다 생감자는 갈고 마늘은 굽고 양파 즙까지 알뜰하게 챙겨먹는, 혼자만 살아남으려고 발버둥치는, 복부 비만의 저, 늙은 개 한 마리”(<중견(中犬)>)

“굶어도 살이 (찌고)/살찌면서 병은 깊어”(<돼지는 굶어도 돼지다>)갈지라도, “호롱불 밑에서 수제비에 감자를 건져먹던 자손들은 그 전쟁터에서 가까스로 살아남아 장하게도 성장했”(<집 - 꿈>)다. 그런데 어머니의 쌀독 긁는 소리를 잠결에 들었던 고향 집은 벌써 무너진 지 오래 되었다. “이미 십 년 전에 무너진 다릿골 215번지 우리 집”(<낮꿈>)을 다시 일으켜 세우는 일은 어머니의 사랑을 되찾는 일이자 신산스러운 유년기 및 성장기와 화해하는 역사(役事)가 될 테다.

“우그러진 놋주발 쉰밥을 물에 빨아 다시 물 말아먹던 힘으로, 밥보다 고추장이 더 많던 비빔밥의 힘으로, 지게 작대기의 힘으로, 쑥국의 힘으로, 돗나물 된장의 힘으로, 하지감자와 고구마의 힘으로, 무엇보다 눈뜨고 돌아가신 어머니 몰래 흘린 눈물의 힘으로 넷째가 집을 짓고 있습니다 바로 그 땅 그 자리에 감나무 밤나무 오동나무 제자리에 앉히고 이중 삼중으로 겨울바람 막아 어떤 자식이 찾아와도 이마 찧지 않을 훤칠한 집을, 막힌 고래 뚫고 불 괄게 들이는 구들장을 다시 깔고 있습니다”(<집 - 꿈>)

글 최재봉 문학전문기자 bong@hani.co.kr, 사진 장철규 기자 chang21@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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