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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성각/소설가, 풀꽃평화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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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이골 엄마의 죽음으로 인터넷에 쏟아져나온
문명 거부자에 대한 혐오와 야유
그들은 왜 그리도 조급한 공격성을 드러냈을까
철석같이 의존하는 문명사회에 대한 불안 아닌지
녹색 에세이/달려라 냇물아
시골 장날 구경은 언제나 흥분된다. 이태 전, 초겨울 화천 장날의 그 재래시장 골목에서 우연히 그들의 뒷모습을 힐끗 보게 된 것은 대체 무슨 인연이었을까. 그들의 모습은 선이골에서 거기 일곱 식구들과 한참 뒹굴며 같이 살았던 임종진 기자가 찍은 너무나 선연한 사진, 선이골 부부가 장 보러 화천 읍내로 내려가면서 몸은 앞을 향하고 시선을 등뒤의 카메라 쪽으로 잠깐 돌리던 그 순간의 모습과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 둘 다 배낭을 짊어지고 있었고, 백발의 미염(美髥)을 자랑하는 김명식 선생은 마르코스 부사령관의 그것과 비슷한 모자를 쓰고 있었다. 얼마 전(1월9일) 급작스레 세상을 떠난 ‘선이골 엄마’ 김용희님(<한겨레> 1월13일 24면 참조) 역시 야무지게 여민 복장에 어깨에 배낭을 메고 있었다. 그 즈음 TV나 책을 통해 ‘선이골 외딴집 이야기’에 대한 소문을 듣고 있었던 터라 나는 “저들이 바로 선이골의 그분들이구나”, 그 뒷모습만으로도 대번에 알아챌 수 있었다. 느긋하지만 설렘이 배어 있는 그들의 걸음걸이는 한가로운 시골 장날 풍경에 색다른 기운을 뿜어내고 있었다. 아니다. 그들이 뿜어내는 기운보다 한촌의 시골 장터에 흐르던 넉넉하고 따뜻한 기운이 더 그들을 기분 좋게 적시고 있었던 것 같다. 달려가 인사 드릴 일도 아니었기에 그저 잠시, 속으로 “장날이라 내려오신 모양이구나”, 그뿐이었다. 그러니 인연이라 할 것도 없다.
하지만 김용희님이 마흔다섯이라는 애석한 나이에 급작스레 세상을 떠난 이래, 그 죽음에 대해 쏟아지고 있는 세상의 지대한 관심과 섣부른 억측과 무지막지한 오해와 동정심을 앞세운 매도에 가까운 모욕들 때문에 다시금 이태 전 화천 장날에 그들의 뒷모습을 힐끗 보았던 기억이 새삼 떠올랐고, 그게 마치 무슨 빚의 감정으로 며칠간 가슴을 무겁게 짓눌렀다.
선이골 엄마의 사망 직후, 가족도 모르는 ‘산후풍’이라는 어이없는 병명이 붙여지더니만, 한 포탈사이트를 통해 쏟아진 야유의 글과 거기 덧붙여진 30만여 개의 댓글들을 얼추 요약하면, “왜 그리 일찍 죽었나? 문명을 거부하고 좋은 물 좋은 공기 택하더니 독이 됐나?” “괴팍한 부모를 만나 학교 문턱에도 못 가 본 아이들이 불쌍하구나. 자식이 부모의 소유물인가?”, 등이었다. 표현은 조금씩 다르지만 수십 만개의 열화 같은 댓글의 한쪽 주장은 문명 거부자에 대한 혐오와 야유, 그리고 교육받지 못한(?) 선이골 아이들에 대한 동정심을 앞세운 단죄로 가득 차 있었다. “다시 도시로 나오고 싶었으나 자신이 없어서 그 스트레스로 죽은 게야”라는 반응은 가상공간의 장막 뒤에 숨어서 뿜어낸 야비한 언어폭력의 극치였다. 그들의 어투와 독설에는 이상야릇한 득의가 차 있어서 마치 대안적 삶을 선택한 사람들의 불행을 학수고대하고 있었던 사람들같이 여겨질 지경으로 잔인했다. 그런 의견을 끈질기게 펼치는 이들은 대개 신경질적이고, 어투는 방자하고, 과학과 기술 신봉자였으며, 경제만능주의자들이었다. 반박이 들어오면, “아니면 말고”식의 껌 씹는 어조로 돌변하곤 했다.
다른 한쪽 주장은 “먼저 고인의 명복을 비는 게 사람의 도리다. 누군가의 행복은 타인이 함부로 그토록 무례하게 재단할 일이 아니다. 제도권 교육보다 부모에게 받은 교육의 질이 더 떨어진다고 누가 단정할 수 있을까. 타인의 불행에 대해 최소한의 예의를 지키자”로 요약할 수 있었다. 고인의 명복을 빌면서 전개된 이 의견들에는 안타까움이 배어 있었고, 선이골의 ‘지금 불행’이 하루 빨리 극복되기를 바라는 소망이 담겨 있었다.
인터넷 출현으로, 물론 거기 참여하는 사람들에 국한된 얘기지만, 사람들의 생각을 유리알처럼 읽을 수 있게 된 측면이 있다. 대중들 머리 속의 송곳과 독, 머리 속의 빛과 다이아몬드를 여지없이 느낄 수 있게 되었다. 사람들 머리 속을 읽어보노라면, 그게 그렇다. 도저히 다른 생각을 가진 이들과 합의에 이르거나 깊은 이해에 다다를 수 없다는 것, 토론에 의해서 세상이 달라지지는 않는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해에 얽히면 갑자기 똑똑해질 뿐, 정답이 없는 문제에서는 저마다 완강하게 자기주장을 할 뿐이다. 이때 합의를 원하는 이들은 절망할 것이고, 그 절망감이 퇴행적으로 발전하면 힘의 숭배로 나아갈 위험성이 있다. 인터넷이 과연 한 사회를 성숙시킬 것인가, ‘광주’ 같은 일이 다신 못 일어날 것이라는 기대에도 불구하고 나는 지극히 회의적이다.
고인이 남긴 책을 다시 꼼꼼히 살피면서 나는 옷깃을 여몄다. 선이골 엄마는 치열하게 성심껏 사신 분이다. 그는 자발적 가난을 택한 뒤에도 풍요를 느끼지 못하면 실패라는 마음속의 배수진을 잠시도 잊어버리지 않았다. 그들의 종교는 하늘이었다. 하늘의 뜻, 자연이 가르치는 소중한 것들에 귀 기울이며 가족들 모두 묵상을 하며 ‘아침맞이’를 통해 하루를 열었으며, 일하고 공부하면서 많이 웃었고, 증오보다도 사랑을 가르쳤고, 서로 배웠다. 오래 관찰하던 이웃들이 마침내 그들을 인정하고 마음을 열었는데, 그로써 그들은 서로 ‘인간’을 나누었다. 제도권 교육을 못 받아 아이들이 무능할 것이라는 염려는 참으로 기우다. 선이골에는 제도권 교육보다 백 배 천 배는 더 섬세하고 정교한, 부모가 정성껏 만든 교육프로그램이 있었다. 그 가정교육의 바탕은 자연과 기꺼운 노동 속에서 벌어졌고, “니가 죽어야 내가 산다”는 세상의 자격증보다 훨씬 견고하고 오래갈 교육의 흔적을 아이들은 이미 오래 전부터 드러내기 시작했다. 그들의 삶을 조금이라도 들여다볼 기회를 가졌다면, 한 가정이 겪고 있는 비극적 현실에 그토록 거친 언어폭력을 구사하던 도시문명 옹호자들이 어쩌면 부끄러움을 느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들은 왜 그리도 조급한 공격성을 드러냈을까. 아마 철석같이 의존하고 있는 문명사회에 대한 설명하기 힘든 불안 때문인지도 모른다.
한 가지 특기할 일은, 대부분 알바들로 밝혀졌지만 지율스님을 죽음에 내몰 정도로 모욕한 사람들과 새만금을 메워 돈 만들려는 사람들과 이번 선이골 엄마의 죽음에 모습을 드러낸 폭력적 세계관을 가진 이들의 얼굴이 어쩌면 그리도 닮았는지 모른다는 사실이다. 누가 정말 안타깝고 불쌍한 사람들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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