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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6.01.26 20:16 수정 : 2006.02.06 15:35

마취술 이전의 하지 절단수술을 그린 토마스 롤란드슨의 그림(1785년).

귀족들이 파티에서 즐기던 ‘웃음가스’
최초로 수술용 마취제로 사용한 롱
정작 명성은 4년 뒤 마취 수술 시연한
모튼과 잭슨에게 돌아갔고
둘은 이권 다투다 고통 속에 생애 마쳐

의학속 사상/(15) 고통과 마취의 역사

1920년대 미국에는 희한한 쇼를 벌이는 사나이가 있었다고 한다. 깁슨이란 이름의 이 사나이는 수영복 차림으로 무대에 등장해 관객을 향해 걸어간다. 통로의 관객들에게는 살균된 핀이 배포됐는데 그가 걸어가는 동안 몸속에 그 핀들을 찔러 넣는다. 50여개의 핀에 찔린 이 사나이는 천연덕스럽게 이 핀들을 하나씩 뽑아낸다. 이런 쇼는 하루에 두 번 19개월 동안이나 계속됐다고 한다. 그는 십자가에 못 박히는 장면을 연출하기도 했는데 한 여인이 놀라 실신하면서 쇼가 중단됐다고 한다.

이 사나이는 일곱 살 때 도끼에 머리를 다치는 사고 이후 어떤 신체적 고통도 느낄 수 없게 되었는데 이후 자신도 모르게 또는 인위적으로 많은 상처를 입으면서 수명을 단축했다고 한다. 이 사나이가 느꼈을 ‘고통을 모르는 고통’이 어떠했으리라 예측하기는 쉽지 않다. 우리가 심각한 고통 속에 있는 사람의 고뇌를 헤아리기가 어려운 것과 마찬가지다. 고통은 물리적 자극에 따른 신경계의 반응일 뿐 아니라, 객관화하기 어렵고 은밀한 실존적 차원의 문제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병을 앓는 사람을 지칭하는 한자어 ‘환자’(患者)에 있는 ‘환’(患)은 벌레 두 마리를 통해 ‘마음’(心)에 꼬챙이가 찔려 있는 모양새를 하고 있다. 질병의 고통은 외부적 요인(벌레)과 내부적 요인(마음)이 합쳐져 생기는 것이란 암시로 보인다. 여기서 병을 앓는 사람은 ‘근심하는 사람’이 된다. 환자를 뜻하는 영어 단어 ‘patient’는 견디어낸다는 뜻에서 유래한 것이다. 질병의 고통은 일방적으로 가해지는 외부적 충격일 뿐 아니라 그것을 경험하는 인간의 주체적 반응을 포함한다는 뜻으로 읽힌다.

신화와 종교의 영역에서 고통은 성스러움이나 내적 위대함을 상징하기도 한다. 십자가에 못 박히면서까지 사랑을 실천한 예수나 인간에게 불을 훔쳐다 준 죄로 산 채로 독수리에게 간을 파 먹혀야 했던 프로메테우스의 고통을 바라보는 세속적 인간은, 이 위대한 영적 존재들과 더불어 아파하기보다는 차라리 비극적 정화(tragic catharsis)를 통해 영적 치유를 얻는다. 이처럼 고통에는 신체적 반응뿐 아니라 실존적ㆍ영적 차원의 ‘의미’가 담겨 있다.

하지만 질병을 몸속의 특정 장기와 조직, 그리고 세포의 수준에서 탐색하기 시작한 근대의학은 고통 속에 담겨 있던 이러한 의미들을 하나씩 거둬내며 세속화시키기 시작한다. 신체적 고통을 줄이거나 아예 없앨 수 있는 방법을 발견한 것이다. 이로써 외과 의사들은 극심한 통증 없이도 광범위한 절제수술 등을 할 수 있게 됐고 근대 외과학은 비약적 발전의 계기를 맞는다.


고통에 담긴 영적 의미

통증을 없앨 수 있는 마취의 발견과 적용 과정에는 당시의 사회상을 반영하는 수많은 사건이 얽혀 있다. 이 과정은 조용한 발견과 시끄러운 적용으로 요약된다. 최초의 전신마취제는 아산화질소 가스다. 1772년 영국의 화학자 프리스틀리가 발견한 이 가스는 지금도 통제가 어려운 어린이 환자를 치료하는 소아치과에서 흔히 사용된다. 이 가스를 흡입하면 기분이 좋아지고 통증에 대한 감각도 무디어져 ‘웃음가스’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기도 하다.

하지만 이 가스가 처음 사용된 것은 의료용이 아니었다. 산업혁명과 식민지배를 통해 부를 축적한 신흥 귀족들은 사람들을 파티에 초대해 이 가스를 흡입하는 여흥을 제공했다. 당시 사람들은 최초의 마취제를 마약이나 알코올과 같이 기분을 좋게 할 용도로 사용했던 셈이다. 이후 에테르와 클로로포름이 발견돼 마취제의 목록이 늘어났고 역시 여흥거리로 사용됐다.

1846년 세계 최초로 시연된 전신마취 외과수술 장면을 그린 그림.
세계 최초로 전신마취제가 외과수술에 사용된 것은 1842년이었다. 미국 조지아주의 개업의사 롱(Craward Williamson Long, 1815~1878)은 에테르 파티에 참석한 경험을 통해 환자에게 이 가스를 흡입시키면 고통 없이 수술을 할 수 있을 것이란 생각을 하고 실천에 옮긴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한 일이 의학사적으로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제대로 깨닫지 못했던 것 같다. 아니면 순진한 시골 개업의로서 돈과 명예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는지도 모른다. 아무튼 그는 이 역사적 발견을 학술지에 발표하지 않고 간직하고 있다가, 1846년 모튼(William Morton, 1819~1868)이 매사추세츠 종합병원에서 공개적으로 전신마취를 통한 종양제거수술을 성공시켜 명성을 얻은 3년 뒤이며 자신이 최초로 전신마취를 시행한 7년 뒤인 1849년 남부 내과외과 저널에 이 사실을 발표한다.

이로써 모든 공은 자신의 시골 진료실에서 조용히 시술한 롱이 아닌 많은 사람이 지켜보는 가운데 공개 수술을 행한 모튼에게로 돌아가게 됐다. 과학과 의학의 역사가 기록되는 방식이 대체로 이와 같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조작과 과장, 그리고 언론을 통한 사기성 홍보의 유혹을 느끼는지도 모른다. 최근의 줄기세포 파동도 이런 맥락에서 생각해볼 수 있을 것 같다.

여하튼 모튼은 일약 유명인사가 됐고 1848년에는 특허를 인정받아 부를 축적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하게 됐다. 1882년 힌클리라는 화가가 세계 최초의 전신마취 수술 장면을 그린 그림이 지금도 보스턴 의학도서관 입구에 자랑스럽게 걸려 있으며 우리는 지금도 대부분의 의사학 교과서에서 이 그림을 볼 수 있다.

욕심으로 빛바랜 성과

하지만 세계 최초의 전신마취라는 역사적 사건은 추악한 이권다툼으로 그 빛을 상당부분 잃게 됐는데 이는 주로 최초의 시연을 해 보인 모튼의 과도한 욕심 때문이었다. 사실 마취제로서의 에테르의 가능성을 가르쳐주고 공개 시연을 할 수 있게 해 준 사람은 의사이면서 화학자인 잭슨이었다. 그런데도 모튼은 특허와 관련된 모든 권리를 독차지하려고 했다. 주위의 간곡한 충고가 있고 난 다음에야 마지못해 잭슨을 공동 특허권자로 등록해 줬지만 무너진 신뢰를 회복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여기에 실질적으로 최초의 전신마취를 시행한 롱이 가세해 삼파전으로 발전해 갔다.

이 싸움은 모튼이 살고 있던 보스턴과 롱의 고향인 대니얼즈빌의 자존심 싸움으로까지 발전해 갔다. 이 과정에서 별로 얻을 것도 잃을 것도 없었던 실절적인 최초의 발견자 롱은 비교적 초연한 자세를 보였지만 모튼과 그의 스승격인 잭슨은 끝내 화해하지 못하고 고통스런 여생을 보내야 했다. 모튼은 뉴욕의 센트럴 파크에서 정신발작을 일으켜 세상을 떠났으며 잭슨 또한 정신병원에 입원해 여생을 마친다. 인류를 외과 수술에 따르는 극심한 고통에서 구원한 두 사람은 이렇게 자신들 속에 자리잡은 시기심과 욕심을 버리지 못하고 또 다른 고통 속에서 생을 마치게 된다. 그다지 욕심이 없었던 롱은 큰 명예를 얻지는 못했지만 이름을 더럽히지도 않았고 큰 고통도 없이 삶을 마감할 수 있었다.

오늘날 우리는 장시간의 수술도 아무런 통증 없이 해낼 수 있는 마취기술을 가지고 있다. 시간에 구애됨 없이 오랫동안 수술을 할 수 있게 됨에 따라 수술 기술이 좀더 정교해지고 성공률 또한 무척 높아졌다. 고단위 진통제가 개발돼 수술 뒤의 통증도 많이 줄일 수 있게 됐다. 현대의학은 인간을 신체적 고통에서 구원해 줬다고 해도 크게 잘못된 말은 아니다.

강신익/인제대 교수·의철학
그러나 아무런 통증을 느낄 수 없었던 깁슨이 인생의 의미를 찾지 못하고 자신의 몸을 혹사해 파국에 이르렀듯이, 모든 고통을 몰아냄으로써 영원한 안식을 얻을 수 있으리라 믿어서는 안 될 것이다. 실제로 현대인들은 수술과 같이 큰 위해사건에서 발생하는 급성 통증은 조절할 수 있지만 만성적으로 지속되는 통증에는 여전히 속수무책인 것이 사실이다. 고통은 우리에게 삶의 의미를 묻게 하며 새로운 삶의 방향을 제시해 주기도 한다. 그러므로 견딜 수 있을 정도의 고통은 우리에게 재앙이기보다는 차라리 축복일런지도 모른다 .philomed@inje.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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