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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날레 계곡의 우마차를 모는 농부. 90년대 이후 황소는 경작과 운송에서 트랙터를 대체했다. 쿠바에서 쇠고기를 구경하기 어려운 이유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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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 해체 직후 농업붕괴 식량 부족
93년 국영농장을 소규모 협동농장으로 개편
식량 자급자족 기틀 마련했다
진전된 사회주의적 생산형태로 난국 넘은 것
북한은 어떤 선택 할까
유재현의 쿠바 탐방기/② 쿠바의 농업개혁
호세 마르띠 공항에 도착한 후 아바나로 가는 대신 곧장 서부의 피나델리오(Pinar del Rio)로 향했다. 농촌을 먼저 체감하고 싶었다. 피나델리오 시에서 하룻밤을 묵은 후 다음날 아침 비날레(Vinales)로 향하는 지방도로변에 펼쳐진 쿠바농촌의 풍경은 소박했다. 담배의 주산지가 피나델리오였지만 때는 12월, 허리를 넘어선 담배 잎의 물결이 일렁이는 모습을 볼 수는 없었지만 밭을 가는 농부들은 무시로 등장했다. 트랙터를 몰거나 황소를 몰며 밭을 가는 농부들의 뒤로는 예외 없이 새들이나 닭들이 분주하게 모이를 쪼고 있었다. 땅이 살아 있다는 증거였다. 땅뿐만 아니라 바람도 살아 있었다. 흙과 풀과 숲의 냄새가 실려 있는 바람. 농약과 비료, 비닐과 플라스틱에 뒤덮인 농촌에 익숙한 내게는 얼마나 생경한 풍경이었던지.
오늘 생태와 유기농업으로 세계적 명성을 얻고 있는 쿠바의 농촌은 1990년 이전에는 전혀 다른 꼴이었다. 상상하기조차 힘들지만 당시에 이르기까지 쿠바농업은 카리브해 인근 국가에 비해서는 세 배의 화학비료를, 미국과 비교해서도 두 배의 화학비료를 소모하고 있었다. 비료뿐 아니라 관개에서도 카리브해 국가의 두 배, 미국의 세 배 이상의 물을 소모하고 있었다. 또한 쿠바농업은 미국의 수준으로 기계화된 농업이었다. 이른바 소비에트식 대규모 기계농업이 쿠바농업의 모델이었으며 쿠바는 30여년간 그런 농업을 발달시켜왔다.
쿠바농업은 또 사탕수수 단일경작을 특징으로 했다. 식민지형 플랜테이션 농업이라는 혁명 이전의 유산을 온존시켜온 셈이다. 1959년 혁명 직후 쿠바의 혁명지도부가 내세운 농업개혁은 토지개혁에 그쳤다. 미국의 경제봉쇄와 소련과 동유럽권의 지원이라는 현실과 타협한 결과였다. 코메콘(COMECON·옛 공산권 경제상호원조회의)은 쿠바의 설탕을 비싼 값으로 사들였고 원유와 식량, 공산품을 싼값으로 파는 것으로 고립된 쿠바를 지원했고 쿠바는 목전의 생존과 발전이라는 유혹 을 뿌리치지는 못했다.
우리가 알고 있는 것처럼 1990년 쿠바는 자업자득의 값비싼 대가를 치러야 했다. 코메콘이 붕괴되고 수출선과 수입선이 모두 끊기자 자급자족과는 거리가 멀었던 쿠바는 대규모의 식량난에 봉착했다. 사탕수수 국영대농장을 중심으로 한 농업 또한 붕괴되었다.
“뿌릴 씨도 없고, 비료도 농약도 없고, 트랙터를 움직일 기름도 없고, 물펌프를 돌릴 전기도 없고, 아무것도 없었다니까.”
피나델리오의 한 늙은 농민은 그 시절을 이런 말로 회상했다. 그건 피델 카스트로에게도 마찬가지였다.
“동지들 우리에게는 기름도 비료도 농약도 없소….”
1991년 쿠바공산당 제4차 당대회에서 피델 카스트로는 비상시기를 선포하면서 고통스럽게 신음해야 했다.
미국 봉쇄로 굶주림 번져
바로 여기까지가 1990년 몰락한 현실사회주의의 모습 그대로의 쿠바다. 때를 놓치지 않고 미국은 카운터펀치를 날리는 기분으로 90년 <쿠바민주화법(토리첼리법)>과 96년 <쿠바 자유-민주 연대법(헬름스-버튼법)>을 차례로 통과시켰다. 문은 더욱 굳게 닫혔다. 쿠바인민이라면 누구나 굶어야 했다. 그 참상을 표현하기에는 너무도 냉정한 수치이지만 1인당 칼로리공급은 89년의 2,908칼로리에서 95년 1,863칼로리로 곤두박질쳤다. 단백질 공급은 절반 이하로 줄었다. 94년 쿠바인민의 몸무게가 20파운드(9㎏) 줄었다는 평가는 그런 가운데서 나온 것이다.
쿠바는 생존하기 위해 농업부터 개혁해야 했다. 수출 기반의 대규모 기계농업이라는 소비에트형 또는 미국형 쿠바농업은 이전까지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했던 불확실성의 길을 걸어야 했다. 이후 쉽지 않은 길을 걸어야 했던 쿠바농업개혁의 특징은 ‘인민과 함께하는 땅(Linking the land to people)’ 그리고 ‘자급자족(Autoconsumo)’으로 요약할 수 있다. 사탕수수 국영대농장의 소규모 협동농장으로의 개편, 파르셀로스(Parceleros)로 불린 개인에 대한 토지이용권의 허용, 도시의 유휴지를 오가노포니코(Organopoico)로 만든 것도 모두 같은 맥락이다.
93년 법령화된 후 사탕수수와 비사탕수수 부문의 국영대농장 대부분을 물려받은 기초단위협동조합(UBPC, unidades basicas de produccion cooperativas)은 규모에서 10분의 1의 경량화된 모습으로 태어났다. 가장 중요한 변화는 작물선택과 운영 등에서 자율성을 가진다는 데에 있다. 식량난 속에 등장한 UBPC는 식량작물을 선호했다. 사탕수수 재배면적이 급속하게 축소된 반면 쌀, 야채, 구근류, 바나나 등의 재배가 확대되었다. UBPC와 소규모생산자조합(CPA) 부문의 생산에 적용된 자급의 원칙은 식량생산을 늘렸다. 연금생활자 등 일정한 요건을 갖춘 개인에게 유휴농지의 사용권을 불하한 파르세레로스 또한 자급의 원칙 아래 탄생한 것이다. 신용서비스협동조합(CCS), 오가노포니코에도 같은 원칙이 적용되었다.
소비에트식 국영중심의 계획농업에서 협동농장 중심으로의 이전은 무척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생산에서 민주주의가 그만큼 신장되었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이것을 사회주의 원칙의 퇴보로 볼 수는 없다. UBPC는 물론 CPA나 CCS 또한 제1의 생산파트너는 국가다. 국가를 대표하는 국영기업은 예측생산량의 80% 수준의 농산물을 수매한다. CPA와 CCS와 같은 소규모 협동농장에 대해서는 국가가 신용을 제공하고 역시 계약에 의해 70-80%의 생산량을 수매한다. 나머지 잔여생산량은 농민시장으로 출하되어 거래된다.
탈농·기계화 포기 등 난제 남아
90년대 쿠바의 농업개혁은 ‘자유화’, ‘시장의 출현’으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CCS를 마치 개인농의 출현과 시장논리의 부활로 보는 시각도 현실과는 다르다. 혁명 후 토지개혁에서 개인농이 배제되지도 않았으며 이후에도 개인농은 엄존하고 있었다. CCS는 개인농에서는 오히려 더 진전된 형태의 사회주의적 생산형태다. 국가와 협동농장 사이의 제도화된 중심적 협력관계는 협동농장을 통한 농업생산의 민주주의를 끌어올리면서도 여전히 사회주의적이다. 93년 탄생 이후 UBPC는 오랫동안 적자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러나 사탕수수에서 식량작물로의 극적인 전환이 이루어졌고 자급자족의 기틀이 갖추어졌다. 시장경제의 관점에서라면 실패한 개혁이라고 할 수 있지만 국가적 차원에서는 식량난의 위기에서 벗어나는 데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사회주의적 관점에서 보면 성공적이었다.
국영기업의 수매량 외의 생산물을 거래할 수 있는 농민시장은 협동조합에 인센티브로도 기능했지만 한편으로는 식량을 분배하는 역할을 했다. 판매주체와 가격을 국가가 통제함으로써 식량난을 해소하는 데에 기여했고 또 암시장에서 폭등한 농산물 가격을 현실화하는 성과를 거두기도 했다.
90년대 쿠바농업개혁을 관통하는 ‘자급자족’과 ‘협동화’ 노선은 식량난을 해소하는 것은 물론 왜곡된 소비에트식 농업구조를 개혁하는 데 지대한 공헌을 했다. 부수적으로 얻어진 것도 있다. 유기농업과 도시농업이다. 비료와 농약, 수자원, 에너지 등에서 극도로 소모적이었던 쿠바농업은 내몰린 한계상황에서 그 활로를 유기농업에서 찾았다. 91년 ‘우리에게는 기름도 비료도 농약도 없다’는 피델 카스트로의 호소는 비료와 농약, 에너지에 의존하지 않는 농업기술의 개발에 전력 질주하도록 했고 마침내 화학에 의존하지 않는 지속적 농업의 전범을 창출했다. 도시농업은 도시가 스스로 식량을 자급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음을 증명했다. 38만5천여 마리의 황소가 4만대의 트랙터를 대신하고 유기비료와 바이오농약을 생산하는 공장이 들어선 쿠바농업의 현장은 깨진 농약병과 플라스틱이 나뒹구는 대신 인간과 자연이 공존하는 지속가능한 농업의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
물론 모든 것이 장밋빛은 아니다. 대단위 기계화 농업의 포기와 경제난에 따른 도시로의 인구집중, 교육수준의 고도화로 인한 농업노동력의 부족은 만성화되어 있다. 농업노동자에 대한 낮은 임금수준 또한 걸림돌이다. 그러나 90년대 쿠바농업개혁은 90년대 이전의 사회주의국가들이 공통적으로 안고 있던 생산의 비민주화와 생산성의 낙후, 농업구조의 왜곡 등의 극복과 식량안보의 실현, 지속가능한 사회의 창출에서 그 전범을 보여주고 있는 것만큼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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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재현/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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