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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6.02.02 17:55 수정 : 2006.02.06 15:39

서경식/도쿄경제대학 교수

96년 일 국가주의자들 ‘새역모’ 발족
그때 나는 반박 호소문을 돌렸다
우익 협박보다 무서웠던 진보파 무관심
10년뒤 스기나미구 왜곡교과서 채택
지역 교원노조의 고투를 보며
더 커진 ‘개미 구멍’에 마음만 무겁다

심야통신

지난 1월 27일 도쿄도 스기나미구 교원조합 초청을 받아 강연을 했다. 나는 지난해부터 바빠지고 몸도 좋지 않은 상태가 계속돼 강연 의뢰는 될 수 있는 한 고사해왔으나 이번만큼은 거절할 수 없었다. 스기나미구 교조가 매우 어려운 상황에서 싸우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연구유학(한국 성공회대 객원연구원)차 일본을 떠나기 전에 조금이나마 그들에게 힘이 돼 주고 싶었다.

도쿄도 서부에 있는 스기나미구는 중산층이 많이 사는 주택가다. 평범한 여성시민이 선도한 핵무기금지운동의 발상지로서 세계적으로 유명하며, 오랜 동안 사회당과 공산당 등 혁신세력의 유력한 지반이기도 했다. 그러나 지금 스기나미구 구청장은 신자유주의자로, 교육문제에 관해서는 우파와 같은 입장의 인물이다. 그 스기나미구에서 지난해 여름 일본의 식민지배와 침략의 역사를 미화하는 우파 역사교과서 채용이 결정됐다. 도쿄도 전체 가운데 스기나미구 중학생들만이 새학년도를 맞는 4월부터 그 교과서로 수업을 받게 돼 있다.

일본 제도로는 교과서는 국정이 아니라 각 지방자치체의 교육위원회가 4년마다 복수의 교과서들 중에서 그 지역에서 사용할 교과서를 선택하게 돼 있다. ‘새 역사교과서를 만드는 모임’은 지난해 봄부터 자신들이 편찬한 역사교과서 채용을 요구하며 일본 전국에서 맹렬한 운동을 전개해왔다. 결과적으로 이 교과서 채택률은 0.4%에 그쳤지만 그것을 ‘시민의 양식이 승리했다’거나 ‘일본사회의 건전성이 발휘됐다’는 식으로 평가하는 시각은 잘못돼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지금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를 쓸 지면은 없다)

스기나미구는 이른바 제방에 틈새기를 낸 개미 구멍이다. 방치해 두면 물이 계속 새어나오면서 구멍이 급속히 커지고 결국엔 제방이 터져 무너지고 대홍수가 나게 될 것이다. 그것을 노린 우파는 교조에 대한 압박을 강화하고 있다. 스기나미구 교조와 일부의 시민은 개미 구멍을 막으려 안간힘을 쏟고 있는 것이다.

*

‘새 역사교과서를 만드는 모임’이 발족한 것은 1996년 12월, 꼭 10년 전의 일이다. 당시 중학교 교과서가 처음으로 일본군 ‘위안부’에 대해 기술하자 저들 국가주의자는 민감하게 반응했다. 그 발족 성명에서 그들은 교과서가 “일본 근현대사 전체를 범죄의 역사로 단죄하고 있다”고 항의하며, ‘자국의 정사(正史)’를 회복하라고 촉구했다. 그러나 이 위험한 움직임에 대해 일본사회의 아카데미즘, 매스미디어, 시민운동 등은 만족할만한 제동 기능을 발휘하지 못했다. 그때 나는 동포 우인·지인들에게 호소해 “걱정하는 재일조선인의 호소문”을 발표했다. 한국적·조선적을 구별하지 않고 기존 단체나 조직으로부터도 독립한 개인들의 자발적인 의사표시였다. 재일조선인 1184명, 일본인 900명의 찬동을 얻을 수 있었다. 그 호소문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 ‘새 역사교과서를 만드는 모임’은 청-일·러-일 전쟁을 아시아 침략전쟁으로 규정하는데 반대하고 있으나, 이들 전쟁이 조선을 전장으로 삼아 전개된 사실, 그 결과가 일본의 대만 및 조선 식민지배로 이어졌다는 사실을 왜 무시하려 하는가. …재일조선인인 우리는 단지 역사의 피해자라는 입장에서 이런 움직임을 고발한다는 역할에 만족하지 않는다. ‘정사’의 날조에 의해 말살당한 과거의 기억을 이어받고 그것을 객관화, 보편화하는 노력을 기울임으로써 열린 역사를 세워가고 싶은 것이다. …이미 충분히 얘기한 것일지라도 그것이 진실이라면 거듭 얘기하지 않으면 안된다. 우리에게 일본의 근현대사는 아시아 침략과 식민지지배의 역사다. 진실을 은폐·왜곡하려는 사람들의 ‘역사에 대한 폭력’을 용납하지 않을 것이다. -

이 호소문을 발표했을 당시 나는 단지 프리랜서 문필가로, 조직도 자금도 없었다. 어쩔수 없이 자택을 연락처로 삼았는데, 일반시민의 격려대신 우파의 협박이 매일 밤 팩스로 밀려들었다. “조선으로 돌아가!”라고 쓴 것은 내게는 익숙한 대사였기에 새삼 화를 북돋우진 않았으나 “민단부인회가 데모 행진을 하고 지나간 뒤에는 언제나 마늘냄새가 난다”는 문구에는 솔직히 온몸이 떨릴 정도로 화가 났다. 그러나 정말 나를 분노하게 만든 것은 그런 우파한테서 받은 해코지가 아니었다. 오히려 진보파로 여겨지고 있던 사람들의 무관심과 무기력이었다. 교원조합도 내가 보기에는 그 무기력한 머조리티(다수)의 일원이었다. “뭐, 저런 치들은 정면으로 상대할 필요도 없다”거나 “저건 일시적인 붐에 지나지 않으니까 내버려 두면 저절로 가라앉는다”라는 것이 그들이 으레 내뱉는 말이었다. 그게 정말이라면 얼마나 좋았겠는가. 10년이 지난 현재 우파 교과서가 실제로 사용되기에 이르도록 상황은 악화돼 왔다. 정부 각료중에 ‘새 역사교과서를 만드는 모임’을 공공연히 지지하는 자들이 포함돼 있다. 자민당은 민주주의와 평화교육의 기둥이었던 교육기본법을 ‘애국심’ 주입을 의무화하는 내용으로 개정하려 하고 있다. 차별과 자기애를 내용으로 한 국민교육은 전쟁 수행을 위해 불가결한 장치다. 이제 그것이 실현되려 하고 있는 것이다.

스기나미구 강연회에서 나는 아무런 낙관적인 전망도 내놓을 수 없었다. 10년 전에 우리 재일조선인들이 표명한 우려가 차차 현실화해온 그 책임은 우파에게 있다기보다는 오히려 무기력하게 상황을 수수방관하고 있는 일본인 머조리티에게 있다. 그 때문에 스기나미구의 싸움은 일본 자신을 위해서만이 아니라 동아시아와 세계의 평화를 위해, 또한 양심과 이성의 재건이라는 보편적 과제를 위해 지극히 중요한 의의를 갖고 있다고 강조했다.

청중은 100명 정도로, 주최자인 교원들을 빼 놓고는 고령자들이 많았다. 그들은 진짜 선량한 사람들이지만 너무 소수다(스기나미구 교원조합 조직률은 10% 이하라고 들었다). 그리고 교원조합 전국조직의 지원도 거의 없는 상태다. 그들은 고립돼 있고 지쳐 있다. 그들은 내 강연이 격려가 됐다고 입을 모아 얘기하며 최후까지 싸워나가겠다고 말했다. 몹시 추운 밤 길을 돌아오면서 나는 그들의 그런 말을 마음속으로 되새겨 봤다. 하지만 마음은 더욱 암울해졌다.

번역 한승동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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