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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6.02.02 20:43 수정 : 2006.02.06 15:49

한때 번성하던 광산도시였으나 우라늄의 수요가 급감하면서 유령의 도시로 변한 와이오밍 주의 제프리 시티. 그러나 제일침례교회는 커티스 블랙맨 목사의 집념으로 죽지 않고 살아 있었다.

홍은택의 아메리카 자전거여행 (37)


와이오밍 주 제프리 시티(Jeffrey City)는 한 때 인구 5천명의, 날로 번성하던 마을이었으나 우라늄 광산이 문닫으면서 유령마을로 바뀐 곳이다. 가는 길은 해발고도 2천m의 그레이트 디바이드 베이슨(Great Divide Basin)이라는 분지형 사막에 나 있다. 길 자체는 평탄했지만 막판에 불어온 바람 때문에 동작이 슬로 모션으로 바뀌고 숨이 턱에 찼다.

제일 침례교회는 마을의 외진 곳에 있었다. 비포장 흙길이어서 자전거가 나가지 않는다. 낑낑거리며 자전거를 밀고 교회 옆에 있는 간이주택(트레일러 하우스)의 문을 두드렸다. 목사 커티스 블랙맨이 반갑게 맞이했다. 이 목사는 교회 곳곳을 안내하면서 교회를 바이크 라이더들에게 개방한 과정을 소상히 설명했다. 몸이 녹초가 돼서 빨리 앉고 싶은데 말이 계속 이어진다.

“이 마을에 있는 모텔과 식당 주인이 교회 신도라서 그들의 처지를 감안해 라이더들을 받는 것을 몇 년 전에 중단했다. 지난해에는 아내가 뇌출혈로 쓰러져 간호하느라 더욱 더 못 받았는데 올해 3월 목사들의 회합에 갔다가 기도하던 중 ‘전 세계에서 온 사람들을 네게 보내겠노라’는 하나님의 메시지를 들었다. 마침 모텔도 문을 닫게 돼서 라이더들에게 교회를 개방하고 있다.”

한때 광산도시로 번성했던 제프리 시티
우라늄 폐광돼 160명 거주 유령마을로
숙소로 찾아든 교회서 만난 노목사
전도에 열성이다 못해 ‘진드기 작전’
신자수 18명…집념 이해할 만하다

지금까지 묵은 교회들은 장소만 빌려주지, 전도는 하지 않았으나 블랙맨 목사는 달랐다. 자신이 뒤늦게 목사로 전신하게 된 경위에서부터 저녁 성경공부에 참가할 의향이 없느냐는 묵시적 권유에 이르기까지 다각도로 공략했다. 나는 목이 말랐고 그저 앉고만 싶을 뿐이다. 세상에 카우보이용 성경이 따로 있다. 성경책 제목은 <카우보이의 길(The Way for Cowboys)>이다. 총천연색의 이 성경은 말을 타고 소의 뿔을 뽑고 로데오 경기를 하는 카우보이들의 간증을 중간중간에 삽입하고 있다.

초콜릿 툭 던져주며 먹으라고?

한국에서 왔다고 한 게 잘못이었다. 그는 한국과 맺은 깊은 인연으로 들어갔다. 신학교를 다닐 때 한국인 동료들이 있었고, 성가를 전공하는 아들이 다니는 음악대학원에도 한국학생들이 있으며 예전에 다니던 교회의 목사가 한국인이었으며… ‘그만해’ 하마터면 소리지를 뻔했다.

그가 마침내 교회 문을 열고 나가려 하자 나는 “바이, 바이”라고 인사했는데 인사라기보다는 다시는 보지 말자고 쐐기를 박는 어조였다. 미안해서 “다시 봐요”라고 급히 덧붙였지만 목사는 이미 전도 효과가 없었다는 걸 알아차리곤 실망한 표정을 지었다.

교회에 붙은 실내체육관의 농구 골대 밑 콘크리트 바닥에 슬리핑 백을 깔고 누웠다. 지금까지 잔 곳 중에서 가장 천장이 높은 곳이다. 저녁 성경공부가 시작되기 전 교회를 빠져나가려고 했는데 목사를 마주치고야 말았다. “배가 고파서 마을에 저녁 먹으러 간다”고 양해를 구하고 잽싸게 빠져나갔다.

마을은 몰락한 지 오래인 듯 번성하던 흔적도 많지 않았다. 지금도 문을 연 캠프장의 길 이름은 방울뱀 길(Rattlesnake Road). 장기간 묵고 있는 몇 대의 캠핑카 외에는 황량하게 비어 있다. 누가 방울뱀 길가에 텐트를 치고 싶을까 싶다. 그리고 보니 교회도 먼지 악마 길(Dust Devil Road)에 있다. 악마의 길을 통해야 교회에 갈 수 있다는 얘긴데, 흠, 어쩌면 맞는 말 같기도 하고.

큰 길가에 있는 술집 겸 카페에는 여자 바텐더와 중년 남자 손님 한 명밖에 없이 휑하다. 이 바텐더는 스탠드를 사이에 두고 손님과 맞담배를 피고 있다가 나를 뻔히 올려다 봤다. 장사하겠다는 뜻이 없는 표정. 담배를 많이 핀 탓인지 고르지 않은 치열이 누렇고 기름통 몸매에다 눈매까지 매서웠다. 거기다 사나운 말투까지 겸비했으나 가히 바텐더로서 이상적인 조건을 두루 갖췄다고는 말하기 어렵다.

아무 거나 먹을 걸 달라고 했더니 케찹병, 겨자병 그리고 나중에는 키스 초코릿 하나 던져 주면서 그게 먹을 것의 전부라고 말했다. 장난인지 박대인지 분간이 안될 만큼 얼굴에 표정이 없다. 손님이 스테이크라도 만들어주라고 내 역성을 들어줬다. 이 바텐더는 “그럼, 네가 만들어주지 그래?” 하고 되받는다.

이 손님이 내게 호기심을 보였다. 역시 주한미군 출신이다. 내게 맥주 한 병을 사줬다. 지금까지 만난 주한미군 출신 미국인들은 한국에 대해 하나같이 좋게 얘기했고 나를 도와주려고 했다. 그런데 나는 그들과 얘기하는 게 즐겁지 않다. 그들이 기억하고 있는 한국은 내가 잊고 싶은, 가난하지만 부지런하고 예의 바르고… 판에 박힌 이미지이기 때문이다.

섹스는 피자와 같다

어쨌든 마이크라는 52살의 이 아저씨는 자칭 바텐더에게 정 음식을 안 만들어주면 진짜 자기가 부엌에 들어가겠다고 압박했다. 바텐더는 하는 수없이 담뱃불을 끄고 햄버거와 양파튀김을 만들어왔다. 고맙다고 했더니 마이크한테 고마워하라고 퉁명스럽게 말했다. 그리고는 다시 마이크와 잡담을 시작했는데 “저 아이(kid)한테는 말하지 마” 하고 말하는 게 들렸다. 계속 엿듣는데 자신이 내년이면 36살이 된다는 것 아닌가. 사실 나보다 나이가 많은 줄 알고 ‘아이’라고 부른 것을 그냥 넘어갔었다. 장유유서의 나라에서 온 내가 가만 있을 리 없다. “나, 마흔 하난데 나보고 아이라고 했어?” 이 여자, 넉살은 좋아서 대답하길, “어, 그래. 바텐더는 말이야. 여자친구이기도 하고, 상담자이기도 하고, 부인이기도 하고, 엄마이기도 하고 모든 게 다 될 수 있는 거야. 그래서 난 아무한테나 아이라고 불러.”

텅텅 빈 마을을 영양의 떼가 접수한 듯하다.
할 말을 잃고 술병들이 놓인 선반을 바라보자 덕지덕지 붙은 ‘격문’들이 눈에 들어온다.

“섹스는 피자와 같다. 좋으면 무지 좋은 거고 나빠도 여전히 좋다(Sex is like Pizza. If it is good, it is pretty good. If it is bad, it is still good).”

“채식주의자는 서부에서는 사냥을 못하는 사냥꾼을 부르는 말이다(Vegetarian is a name in the West for a bad hunter).”

이런 경고문도 있다.

“우리는 내버려둔 성인(그리고 여성들)에 대해서는 책임을 안 짐(No responsible for adults (and women) unattended).”

재치 있는 이 구절들을 읽어줄 손님들은 더 이상 오지 않았다. 식사를 마친 후 바텐더에게 “고마워, 엄마”라고 인사하고 나왔다. 바텐더의 표정이 찌그러졌다.

교회로 돌아와서 성경공부를 끝내고 돌아가는 신도 2명과 목사, 그리고 뇌출혈로 전신이 마비돼 휠체어를 타고 있는 목사 부인 패트리샤를 만나 인사했다. 블랙맨 목사가 패트리샤의 휠체어를 밀어 교회 문을 나가려는 순간 내가 예의상, 신도가 몇 명이냐고 물은 게 잘못이었다. 블랙맨 목사는 기다렸다는 듯이 말문을 열었다. 그리고 서서 30분간 얘기했다. 휠체어의 손잡이를 여전히 잡은 채.

그는 시어스(Sears)라는 큰 백화점의 간부였다. 24년 전인 81년에 그만둘 때 월급이 3만5000달러였다고 하니까 잘 나가가던 사람이었다. 그 때 나이 44살. 하나님의 뜻을 전하기로 결심, 퇴사하고 텍사스 주 포트 워드에 있는 신학교를 다녔다. 어디서 목회활동을 할까 고민하던 중 하나님으로부터 제프리 시티로 가라는 계시를 받았다. “오 주여, 왜 하필 제프리 시티입니까?” 그는 망설였지만 그곳에 교회가 있기를 바라는 하나님의 뜻을 받들어 이곳으로 왔다. 15년 전이다.

제프리 시티는 과거에는 ‘홈 오브 더 레인지(Home of the Range)’라고 불렸다. 레인지는 탁 트인 목장을 뜻한다. 그런데 이곳에 우라늄이 매장돼 있는 것이 알려지고 우라늄을 채광하면서 번성했다. 광산의 소유주였던 찰스 제프리는 자신의 이름을 따서 ‘제프리 시티’로 개명했다. 제프리는 이 마을이 유령도시의 상징으로 변한 지금에는 무덤에서 개명을 후회하고 있을 것이다.

1979년 펜실베니아 주 스리 마일 아일랜드에서 일어난 방사능 누출사고가 결정적이었다. 원전의 위험성에 대한 인식이 확산되면서 우라늄 수요가 급감하자 광산들이 문을 닫았다. 지금은 인구 160명의 죽어가는 마을이다. 이렇게 작은 마을에 교회가 존재하는 것은 오로지 68살 노목사의 집념 때문이다. 등록된 신자 수는 18명이지만 매주 일요일 교회에 오는 사람수는 10명 안팎이다.

“원전 흥하면 교회 일어나겠죠”

블랙맨 목사는 이미 마을이 죽어가는 상태에서 이 교회에 왔다. 헌금으로는 먹고 살 수 없다는 걸 알았다. 그는 기도했다. “주여, 저는 신도들에게 경제적으로 어렵다는 얘기를 하고 싶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제 생활을 책임져 주십시오.” ‘그래, 네 먹고 사는데 어려움이 없게 하겠다’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고 15년 동안 어떻게든 먹고 살고 있다고 말했다. 특히 지난해 뇌출혈로 쓰러진 패트리샤의 병원비로 보험에서 부담하는 것을 제외하고도 5만달러가 나왔지만 하나님께서 마련해주셨다고 했다. 그의 생활비 자체는 얼마 들지 않는다. 20년 된 고물차를 타고 다니고 트레일러 하우스에서 산다. 이게 인구 160명밖에 안 되는 이 마을에 교회가 건재하고 그래서 라이더들이 사막을 건너는 길에 하룻밤 신세지고 갈 수 있는 오아시스가 있는 배경이다.

큰길가 바에 갔더니 험학한 인상의 여주인 장사할 뜻이 없다
나이 35살이라면서 나보고 “키드”란다 그래서 “고마워 엄마” 받아쳤다

홍은택/〈블루 아메리카를 찾아서〉의 저자
제프리 시티가 다시 번성하고 그래서 이 큰 교회에 신도들이 가득 찰 날이 올지 물었더니 그는 석유값이 올라가면서 핵발전소에 대한 필요성이 커지면 혹시 그런 날이 올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요즘 들어 부쩍 사람들이 광산의 문이 다시 열릴 날이 올지 모른다고 얘기하고 있지만 누가 알겠느냐고 말했다.

그러나 제프리 시티가 재기하는 날은 세계인들에게는 불행한 날이다. 그만큼 사람들이 에너지를 마구 써서 재앙이 잠재적으로 얼마나 클지 모르는 원전을 더 필요로 하는 날이 온다는 뜻이다. 그러나 자전거혁명이 성공해서 사람들이 자동차 대신 자전거를 타기 시작한다면 그런 날은 오지 않는다. 그러면 반대로 제프리 시티는 이렇게 임종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블랙맨 목사와 우리는 서로 의식하지 못한 채 대척점에 서 있는 것이다. hongdongzi@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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