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주요메뉴 바로가기

본문

광고

광고

기사본문

등록 : 2006.02.08 17:13 수정 : 2006.02.08 17:16

숭례문 원형 발굴

『남대문. 국보 1호. 서울특별시 남대문로 4가 소재. 원명 숭례문(崇禮門). 1395년(태조 4년) 성곽의 축성과 동시에 기공하여 1398년(태조 7년) 2월에 낙성되었다. 현재의 건축은 1447년(세종 29년)에 개축한 것으로 서울에 남아 있는 목조건물 중에서 가장 오랜 것이다』(새국사사전, 남대문)

현재 국보 재지정과 관련하여 논란의 중심에 있는 서울의 숭례문(국보 1호)이 창건된 날이 바로 608년 전 오늘(2월 8일)이다. 숭례문의 창건일이 2월 8일이라는 것은 1962년 2월 3일 남대문 해체 작업 중에 발견된 남대문 상량문 사본에 의해 밝혀졌다. 이 상량문에 따르면, 도성 남문 상량이 1396년 10월 6일에 이루어졌고, 1398년 2월 8일에 완성되었으며, 보수 상량은 1448년(세종 30년) 3월 17일에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이조실록에는 보수상량이 1447년(세종 29년) 8월에 명령이 내려진 것으로 기록하고 있어, 그 명령을 받은 감독이 이듬 해인 1448년 3월에 상량을 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서울에 현존하는 목조 건물로는 가장 오래된 이 숭례문은 하층을 화강암으로 구축하고, 중앙의 홍예문을 중심으로 견고한 외관을 가진 성문으로서, 5간 2면의 누각을 가진 웅장한 형태의 2층 건물이다. 특별히 대문의 양쪽에 성벽이 연속되어 있었으나 1908년 길을 내기 위해 성벽을 헐어 오늘의 형태가 되었다. 현재의 숭례문은 한국전쟁 당시 파괴된 곳을 1956년에 보수하였고, 1962년에 전면적인 개축을 한 것이다. 특별히 지난해에는 주변에 공원을 조성한 후 시민들의 휴식공간으로 개방(2005년 5월 27일)하여 보다 친숙한 문화 공간으로 우리에게 다가 오게 되었다.

최근에 숭례문과 관련하여 국보 1호의 지위를 재조정해야 한다는 논의가 일어나게 된 것은 초기에 국보가 지정된 배경과 관련된 문제 때문이었다. 숭례문을 국보 1호로 지정한 것은 공교롭게도 일제에 의해서였다. 일제는 조일전쟁(1592년) 당시 왜병이 이 숭례문을 통해 조선의 도성에 입성하였다는 역사적인 사실에 의미를 두고 남대문을 국보 1호로 지정했다. 국보의 번호는 유물의 가치 여부에 따라 붙여진 것이 아니라 지정된 순서에 따라 붙여진 것이기 때문에 숭례문은 국보 1호가 되었고, 그 후에 순서대로 국보로 지정할 때마다 번호가 붙여져 오늘의 국보 체계에 이르게 된 것이다.


이런 역사적인 배경에도 불구하고 국보에 대한 일반인들의 인식은 가치 중심적이다. 그도 그럴 것이 어린 시절부터 남대문은 국보 1호, 동대문은 보물 1호 하는 식으로 국보 및 보물을 강조하면서 유물의 우수성을 강조하는 문화적 풍토 속에서 살았기 때문에 시민들은 자연히 국보 1호는 우리나라 문화유산 중 가장 가치 있는 것이라는 생각을 가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국보의 순번이 유산을 관리하기 위해 지정된 순서대로 번호가 매겨지는 것이라는 사실을 인식하기는 쉽지 않다.

이런 시민들의 보편적인 인식에 따라서 국보를 가치의 순서대로 재지정해야 한다는 것이 최근의 논의의 핵심인 것이다. 이런 인식에 따라 훈민정음이나 팔만대장경 등이 국보 1호가 되어야 한다는 논의가 한창 진행되기도 했다. 그러나 문화유산의 가치를 국보 몇 호 하는 식으로 모두 서열화할 수 있을까? 탈영토화, 다원화 시대에 문화유산의 서열 매김이 무슨 의미를 가질 것인가?

지난 해 말 새롭게 개관한 국립중앙박물관에 아이들을 데리고 갔을 때 안내문에는 중요 문화 유물들을 중심으로 관람할 수 있는 친절한 안내문이 있었다. 덕분에 우리 가족들은 부족한 시간도 줄일 겸 그 안내도를 따라 중요 유물들만을 간단하게 살펴보고 첫 박물관 구경을 마쳤다. 그 때는 물론 다음의 방문을 위한 예비방문이었다는 사실로 애써 위로를 했었다. 그러나 그 후 몇 달이 지나도록 아직도 본 방문을 하고 있지 못하는 지금, 그 때의 안내문은 오히려 아쉬움이 많다. 문화유산의 가치가 역사와 더불어 존재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역사보다는 현대 문화가 부여한 순위로 매겨지지는 않을까 하는 걱정이 앞선다.

숭례문이 일제에 의해 국보 1호가 된 배경은 조금 아쉽다. 역사적으로도 문제가 있음이 분명하다. 따라서 문화재 관리와 관련한 정책이 전반적으로 재조정되는 과정에서 국보 체계의 정비 또한 필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역사바로세우기 차원에서 국보 지정의 역사적 재검토는 반드시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지난 1955년 6월에 문화재 위원회가 행했던 문화유산에 대한 심의 작업은 일제가 지정한 문화유산들에 대한 심의를 골자로 한 것이었다. 즉 국보와 보물로 지정된 문화재들이 그만한 지정 가치가 있는 것이었는지에 대한 심의가 중심이 되었다. 하지만 문화재 지정과 관련된 역사 전반을 검토하지는 않은 것 같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바로 그 문화유산 지정 및 관리와 관련된 역사 전반의 문제를 검토하는 작업일 것이다. 불행하게도 우리의 문화재 지정 및 관리의 역사가 일제시대에 시작되었기 때문에 이 부분은 역사적으로 정리되어야 할 과제가 많은 것이 사실이다. 따라서 좀 더 역사적이고 전문적인 대의에 따라서 문화재 관리 전반에 대한 재검토가 하루 빨리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국보의 순서를 정하는 문제는 그런 검토 과정에서 나타난 결과를 토대로 다시 논의 되어야 하지 않을까?

숭례문은 예를 숭상한다는 의미를 가진 이름의 문이다. 이것은 조선시대 건축에 있어서 남쪽을 예로 하는 전통적 관습에 따른 것이다. 경복궁의 근정전 앞에 있는 남쪽 문이 흥례문인 것도 바로 이런 규칙을 보여준다. 이는 우리 조상들이 예로부터 禮를 중요시 한 결과이다. 물론 崇禮라는 이름에는 남쪽의 불꽃을 누른다는 풍수지리학적 의미도 담겨 있지만 지금 우리시대에 더 필요한 이름의 교훈은 역시 예를 숭상하는 조상들의 정신일 것이다. 인의예지(仁義禮智)의 4대 덕목 중에 예를 숭상함으로써 사회의 질서를 유지하고자 했던 조상들의 정신이 오늘 우리에게도 계승되어 동방예의지국으로서의 면모를 일신했으면 좋겠다.

조선 600년의 역사 이외에, 예를 숭상하는 조상의 정신적 교훈을 간직하고 서울의 한 복판에 우뚝 선 숭례문! 아마도 이런 의미에서 우리의 마음속에는 항상 소중한 문화유산으로 남을 것이다. 그것이 국보 1호인지, 몇 호인지...그것은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니다. 그 문화유산이 가지고 있는 역사와 의미, 그것이 중요한 것이다.

| 한겨레 필진네트워크 나의 글이 세상을 품는다



광고

브랜드 링크

멀티미디어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한겨레 소개 및 약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