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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6.02.08 17:54 수정 : 2006.02.09 17:44

이가현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 4년

2005대학별곡

“그저 부모님께 죄송할 따름…”

“빛나는 졸업장”을 탄다는 졸업식. 색색의 꽃다발, 검정 학사모, 껌 파는 후배들, 기념 촬영 기타 등등을 떠올리게 마련이다. 그런데 필리핀 항공권을 떠올리는 이도 있다.

지난해 한국과학기술원을 졸업한 박상희씨는 졸업 때문에 필리핀에 다녀왔다. 당시 박씨는 서울대학원 산업공학과에 합격한 상황이었는데 토익 760점 이상이라는 졸업 기준을 채우지 못했다. 졸업을 한 달 앞둔 때였다. 한국에는 토익 시험이 없어 걱정을 하던 차에 필리핀에서는 토익 시험이 자주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던 것. 망설임 없이 필리핀으로 날아가 열흘 가량 민박집에 머물면서 시험을 보고서 만족스러운 점수로 한국에 돌아왔다. 지금은 웃으면서 추억할 수 있는 일이지만, 하마터면 졸업을 못 할 수도 있는 아찔한 상황이었다.

졸업 철이다. 이제 축포 소리는 크지 않다. 대학 졸업은 더이상 가족 대사도 아니고, 성공의 보증수표도 아니다. 눈물도 그만큼 줄었다. 졸업의 뒷풍경과 풍경을 가봉하는 소소한 사연들만 다양하게 널려 있을 뿐. 가난을 이겨내고 졸업했을 아무개의 사연보다 토익 때문에 살얼음판을 걸었던 박씨의 것이 21세기적이다.

어학 연수, 배낭 여행 등이 필수인 요즘엔 휴학 한 번 없이 졸업하는 것도 그대로 뉴스다. 곧 졸업을 앞두고 있는 우영화(중앙대학교 간호학)씨도 그렇다. 떼밀리듯 급히 4년을 보내고서 졸업하는 처지에 대해 “후회 없다”며 수줍게 미소짓는다. 오히려 직장 생활을 하며 “대학원 진학 준비를 하고 싶다”하니 몇 가지를 버린 대신 택할 수 있는 옵션들이 훨씬 늘어난 셈이다.

박인선(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씨도 군대를 다녀온 것 말곤 외도가 없었다. 그러나 우씨와 다르게 아쉬움이 많다. 졸업 심사가 까다로운 연극원에서 이렇게 졸업하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인데, 박씨는 “어린 나이에 들어와서 내공을 쌓는 게 부족했던 것 같다”며 “나머지 공부를 하는 마음으로” 대학원에 진학한다. 형식적으론 졸업하지만 다시 새내기로 학교에 남는 것이다. 때문에 17일 있을 졸업식도 그저 “덤덤하다.”

오는 17일에 졸업하는 김은주(경기대 국어국문과)씨도 아쉽기는 마찬가지. 그래서 졸업 후에도 신입생 오리엔테이션에 참석해 동아리 공연을 할지도 모르겠다고. 졸업은 그야말로 별개의 문제다.

어쨌건 이들은 졸업식을 빛내는 그들 자신이 꽃이다. 하지만 꽃이 되길 거부하는 이들도 많다. 여전히 도서관에 처박혀 있거나 짙은 회한을 달래려 술집으로 향하는 이들도 많다. 대개 취업 때문이다.


ㅇ대 96학번 정아무개씨는 9년 만에 졸업한다. 세 번의 학사 경고와 제적, 군 복무와 재입학. 하지만 이런 감격보다 졸업을 해도 취업이 막막한 착잡함이 더 크다. 정씨는 졸업식 참석 여부를 고민 중이다. “그저 부모님께 죄송할 따름”이라는 것이다.

박기원(극동정보대학 건축과 졸업예정)씨는 졸업식 날짜도 모른다. 동기들과 함께 졸업할 시기를 놓쳤다. 후배들과 같이 하는 졸업식은 참석하기 쑥스럽단다. 졸업 앨범비는 냈지만 앨범 촬영은 안 했을 정도로 졸업에 무성의, 무관심으로 일관하고 있다. 졸업이 자신에게는 별 의미 없다는 태도다.

아무리 제 사연들이 제각각이라고 해도 ‘졸업’은 모두에게 ‘시작’으로 이어진다. 졸업식이 오늘처럼 가벼워진 건 차라리 ‘시작’의 부담도 그만큼 적다는 이야기가 될 수 있지 않을까. 학생 할인이 더 없을 뿐이다. 그냥 새로 시작하면 된다.

이가현/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 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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