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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6.02.08 20:33 수정 : 2006.02.09 00:52

“생각이 막힘없이 뻥뻥 뚫리는 낯도깨비 같은 사람이었지”

70년대 ‘티브이 캔들’ 보고
“범상치 않은 작가” 직감

‘굿모닝 미스터 오웰’ 계기
국내에 작품들 첫 소개

“사는동안 원하는것 다 해봐
여한이야 없겠지만…”

“백남준은 동년배예요. 같은 32년생이지만 내가 생일이 하루 빠르지. 부음을 접하면서 그가 써줬던 옛 전시 서문이 자꾸 생각나더군요.”

거장 백남준(1932~2006)의 비디오 판화 작업들을 80년대 국내에 처음 소개했던 컬렉터 정기용(74·전 원 화랑 대표)씨는 90년 백남준과 함께 전시했던 요셉 보이스 추모전 도록을 먼저 보여주었다. ‘보이스 복스’란 제목의 이 전시는 백남준이 1986년 숨진 동료 보이스를 기려 원화랑과 현대화랑에서 열렸다. 백남준이 작품 출품은 물론 굿판까지 벌였던 당시 전시의 도록에는 그의 서문과 회고담이 실렸다. 정씨가 보여준 서문은 이렇게 시작된다. “나도 이제 쉰에서 다섯이 넘었으니 차차 죽는 연습을 해야겠다. 예전 어른이면 지관을 데리고, 묘자리를 찾아다닐 그런 나이가 됐으나, 돈도 없고 요새는 땅값도 비싸졌으니… 오붓하게 죽는 재미를 만드는 것이 상책이다….”

1992년 8월 정씨와 백남준씨가 원화랑에서 기획했던 ‘존 케이지’추모전 전시장 전경(왼쪽). 케이지의 악보 외에는 모두 백남준의 작품이다. ‘귀거래’란 문구가 적인 전통부채, 케이지의 얼굴이 나오는 영상물, ‘바람바람’이란 친필 글씨, 촛대 등이 보인다. 정기용씨 제공


언론을 만나길 꺼리는 편인 정씨가 백남준의 80~90년대 국내 전시에 얽힌 추억들에 대해 7일 처음 입을 열었다. 아울러 파일함 7~8상자 분량의 사진, 서류, 친필 문서 등 수북한 백남준 관련자료도 최초로 <한겨레>에 공개했다. 그는 70년대 중반 프랑스 파리 시립미술관에서 텔레비전 상자 안에 촛불을 켠 고인의 ‘티브이 캔들’을 처음 보고 범상치 않은 작가임을 직감했다고 한다.

“80년대 중반 독일 하이델베르크에 백남준과 보이스의 판화를 보러간 적이 있었지요. 백남준이 하이델베르크 성 아래를 어슬렁거리다 신발 한짝을 잃어버렸어. 퍼포먼스? ‘당신 왜 그 모양이야’하고 면박을 줬더니 백남준이 ‘내 나이쯤 되보면 안다’고 둘러대더군. 나이를 물었더니 같더라구요. 생일도 따져봤는데 7월20일이야. 내가 19일이니 하루 차이로 형님뻘이 된다고 했더니, 거짓말 말라고 펄쩍 뛰더군. 주민등록증 보여줬더니 ‘암만 해도 가짜야’라고 계속 투덜거리더라구….”

백남준이 정씨에게 보낸 연하엽서.
백남준과의 첫 전시는 지금도 회자되는 84년 벽두의 위성 영상쇼 ‘굿모닝 미스터 오웰’ 프로젝트가 계기였다고 한다. 83년 여름 파리 국제 미술품 판매전람회(피악)에 갔다가 작가 김창렬씨의 현지 저택에서 우연히 고인과 저녁을 먹게 된 그는 뜻밖의 부탁을 받는다. “프랑스, 미국, 한국을 연결하는 위성 쇼를 하려고 하는데 방송판권을 사들일 비용 수십만 달러가 필요하다고 했어요. 춤꾼 머스커닝햄, 스승격인 전위음악가 존 케이지 등과 판화 250부를 찍어 돈을 마련하겠다고 하더군. 그래서 내가 일단 40부를 부당 500달러씩 사줬어요. ‘굿모닝 미스터 오웰’이 끝난 84년 2월 국내에서 그걸로 3인 판화전을 했지. 그게 백남준 국내전의 시작이었지요.”


1990년 국내에서 보이스 추모 굿판을 벌일 때 무당으로 분장한 백남준.
전시회의 인연은 90년 보이스를 추모하기 위해 마련한 보이스복스전, 92년 유치원 동창인 만평작가 백인수씨와 백남준의 2인전 이백(二白)전 등으로 이어졌다. 이백전을 벌이던 중 존 케이지가 숨졌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백남준은 곧장 전시를 추모전으로 바꿔 치렀다. “낯도깨비 같은 사람이에요. 뜬금없이 유치원 동창전을 하겠다고 하질 않나, 만들어줬더니 때려치우고 케이지 추모전을 급조했으니 말이죠. 그런데 그 추모전이 보통 전시가 아니었어요. 티브이 영상과 추모 글씨, 케이지의 사진과 악보 등을 진열한 최초의 추모전이었는데, 특유의 철학적 사색과 끼가 가득했어요.”

설치조형물 ‘다다익선’앞에서 정기용, 박명자 현대화랑 대표와 같이 앉은 백남준. 정기용씨 제공
돈은 못벌고 백남준 하자는 대로 다해주었다는 그는 전시 때 찍은 고인의 사진 수백여 장과 친필 작업 계획서, 서신, 연하장 등을 일일이 보여주었다. 나중에 사료로 기증할 생각이 있느냐는 물음에는 그때 가봐야 알겠다고 했다. “생각이 막힘없이 뻥뻥 뚫리는 이였지요. 누구도 생각지 않았던 비디오 영상을 버젓한 예술로 만들었으니. 사는 동안 원하는 것을 거의 다 한 양반인데 여한이 있겠어….”

학창시절부터 미술품 수집에 몰두했다는 정씨는 화랑가의 전설적인 컬렉터로 알려져 있다. 고미술 현대미술에 두루 밝은 그는 2000년 화랑계에서 은퇴한 뒤 친구인 오광수 관장 등과 가끔씩 만나는 것 외에는 자택과 전시장에서 소일한다고 했다.

글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사진 임종진 기자 stepan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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