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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이현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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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공비행
이 글은 참회로 시작하련다. “소녀장사 윤은혜? 캐스팅이 장난이냐. 주지훈은 또 누구야? 생짜 신인이 주인공이라니 너무 하네. 천하의 황인뢰 피디도 이제 감을 잃은 건가.” 시작도 하기 전에 이러쿵저러쿵 찧고 까불었던 건, 얇은 귀 때문이었다. 원작만화를 읽은 이들이 일제히 드라마 <궁>의 주연급 캐스팅에 대해 극심한 우려를 표한다는 소문이 들려왔고, 만화도 안 읽은 주제에 나도 덩달아 부화뇌동했던 거다. 하지만 개종은 자발적으로 이루어졌다. 처음 1-2회에 “오호, 영상 괜찮네. 미술도 죽이잖아!” 로 시작했던 감상이 회를 거듭하는 동안 스르르 변하여 어느새 ‘완전소중궁’이 된 것이다. (취향에 대한 시비는 사절하겠다. 2006년 2월 현재, 내가 <궁>에 불타오르는 이유는 이 작품이 완벽한 드라마이기 때문이 결코 아니다. ‘성장’이라는 모티프에 유난히 매혹되곤 하는 나의 코드와, 그 드라마의 어떤 부분이 절묘하게 맞아떨어졌기 때문이다.) 사랑은 맹목일까? 채경과 신이라는 캐릭터를 윤은혜와 주지훈 없이 떠올리는 것은 나로서는 이제 불가능한 일이다. 만화 ‘궁’을 망치고 있는 드라마 <궁>을 아직도 용서할 수 없다는 분들께는 이렇게 말씀드리고 싶다. “아, 이 사람아. 만화는 만화고, 드라마는 드라마지!” 비단 <궁>에 국한된 문제만은 아니다. 알려진 원작을 영화나 드라마로 각색하는 경우, 맨 먼저 돌파해야 하는 과제가 ‘원작과 얼마나 똑같은 지를 스스로 입증하는 것’일 때가 허다하다. 캐스팅에서부터 극본의 디테일에 이르기까지, 보는 사람도 만드는 사람도 ‘원작’이라는 유령에 단단히 짓눌려 있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많은 것이다. 그래서일까. 소설과 영화 혹은 만화와 드라마가 서로 전혀 다른 장르라는 근본적인 사실은 이상하리만치 자주 망각된다. 얼마 전, 내 단편소설을 원작으로 한 단막극이 방송되었다. 내 머릿속에서 나온 것이 틀림없는 그 내러티브를 정작 나 자신도 처음 대하는 듯 흥미롭게 시청했다. 방송이 나가고 나서, 주변사람들에게서 이런 저런 질문을 많이 받았다. 각색에 불만이 없느냐는 내용이 주류를 이루었다.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극본 상에는 원작소설에 없는 에필로그가 첨가되어 극 전체의 결론을 원작과 전혀 다르게 내리고 있었는데, 불쾌하기는커녕 ‘아하. 저럴 수도 있었겠구나’ 라고 공감했던 것이다. 그리고 자막이 올라가는 동안 깨달았다. 감히 확신컨대 세상에는 원작보다 못한 각색은 있을 수 없다. 서로 다른 장르의 작품을 줄 세워 우열을 가릴 수 있는 객관적 척도 자체가 애초부터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 의미에서, 원작에 충실한 각색 아니면 원작과 다른 각색이 있을 뿐이다. 각색작품의 완성도를, 원작에 대한 충실성에 따라 판단하는 것은 이제 그만했으면 싶다. 보는 이는 각색작품의 자율성을 인정하고 그것을 하나의 독립적이고 개별적인 텍스트로 받아들여야 할 것이며, 만드는 이는 원작의 틀에 지나치게 연연하지 말고 원작의 모티프를 보다 다양한 방향으로 발전시켜 나가야 할 것이다. 원작의 숨겨진 틈새를 드러내고 새롭게 해석하는 시선이야말로, 그 작품을 비로소 진실로 새롭게 태어나게 하고 오래오래 기억되게 하는 힘임을 잊지 말았으면 좋겠다. 마음에 맞는 드라마를 발견한 사람들은 운이 좋다. 적어도 두어 달은 너끈히, 이토록 지루한 생을 활기차게 견뎌낼 수 있으니까. 요즈음 나를 견디게 해주는 드라마 <궁>을 이제부터는 원작만화가 아니라 다른 성장드라마와 비교하면서 봐야겠다. 시간이 지날수록 누가 황위에 오르느냐보다 그 아이들이 어떻게 팔짝거리며 스스로의 껍질을 깨나갈지가 훨씬 더 궁금하니 말이다. 정이현/소설가광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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