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6.02.15 22:45
수정 : 2006.02.15 22:45
보컬트레이너 1호 김명기씨
1993년부터 시작해 ‘보컬트레이너 1호’로 꼽히는 김명기(38)씨의 제자 목록은 화려하고 길다. 휘성, 거미, ‘엠시 더 맥스’의 이수 등인데 일반인들까지 합치면 1만2000여명에 이른다. 지금이야 ‘김명기 보컬 아케데미’라는 교육기관을 운영하며 잘 나가고 있지만 처음엔 헛발질의 연속이었다고 한다. 당시엔 보컬트레이너라는 직업은 커녕 대중음악 가수가 노래를 배워야 한다는 생각 자체가 생소했던 때다. 호랑이 선생님으로 군림하며 트레이너로서 자존심도 강한 그가 불모지다시피 한 상황에서 어떤 과정을 밟아 왔는지 들어봤다.
일반인등 1만2천명에게 가르쳐
-원래 꿈은 뭔가요?
=중학교 2학년 때부터 노래하고 싶었어요. 혼자 연습하다 답답해서 형들한테 물으면 어떤 질문이건 뾰족한 답 없이 항상 ‘연습 부족’이라는 말만 하는 거예요. 재즈, 솔, 블루스 등 장르 구분 없이 노래 잘한다는 가수 200명을 뽑았어요. 개성도 강하지만 한 음에서 다른 음으로 이동할 때 공통적으로 쓰는 방법이 있었어요. 책이라곤 성악, 판소리 관련된 것 밖에 없으니 이거라도 뒤져보고 대학에서 강의도 들었는데 가요 부르는 덴 크게 도움은 안됐어요.
-어떻게 보컬트레이너가 됐나요?
=제가 처음부터 노래를 잘 했다면 아마 가르칠 생각도 안 했을 거예요. 1992년 ‘뉴 키즈 온 더 블록’이라는 미국의 아이돌 그룹이 한국에 왔는데 그 공연장에서 몇 명이 깔려죽었어요. ‘우리나라 음악은 뭐가 부족하기에 다른 나라 가수들한테 저렇게 열광할까’라고 생각했죠. 가르치면서 배워보자고 결심했어요. 지금은 많이 나아졌지만 당시만 해도 악기 연주도 아니고 노래는 누구나 할 수 있는 거라고들 생각했어요. 3년 동안 배우는 사람이 한명뿐이었죠. 5년 되면서 3명이 되더군요. 초창기엔 정말 오류도 많았고 욕도 많이 먹었어요. 예를 들면 고음이 멀리 뻗어나간다고 가르쳤는데 사실은 저음이 멀리 나가거든요. 그건 음악엔지니어들은 금방 아는 거예요. 그래서 엔지니어 공부도 했죠.
우스개지만 노래 가르친다니까 도전장을 내미는 사람들도 있어요. 예를 들면 ‘아르앤비로 겨뤄보자’고 그래요. 그러면 자존심 있으니까 그때부터 아르앤비 가수 50명 뽑아서 분석해요. 그런 식으로 모든 장르를 두루 공부하는 거죠. 이후 음악전문잡지인 <핫뮤직>에 보컬트레이닝에 관한 글을 2년 동안 연재하고 8년 동안 1년에 2번씩 공개강좌를 벌였어요. 사람들한테 가요 부르는 게 그렇게 쉽지 않다는 걸 알려주고 싶었죠.
무엇보다 노래하는 자세와 느낌을 중요하게 가르쳐요. 그리고 처음부터 끝까지 발성이 핵심이죠. 제가 아끼는 제자들이 못따라오면 때릴 정도로 무서운 선생이에요.
-기억나는 제자는?
=휘성이요. 노력하는 가수죠. 저도 그렇지만 그 친구 목소리는 아직 미완성이에요. 그래서 더 많은 걸 보여줄 수 있을 거예요. 거미도 기억에 남아요. 라이브할 때 목이 많이 쉬어서 스트레스를 받고 있었어요. 6개월 정도 가르쳤는데 배우는 속도가 보통 사람들의 4배 빨라요. 재능이 탁월했죠. 성악식 호흡법을 대중음악에 맞게 바꾸고, 소리를 잡아 띄우는 방법과 코를 울려내는 비성을 가르쳤어요. 저와 비교하게 되는데 저는 보통 사람 만큼밖에 재능이 없는 사람이에요.
50살쯤 되면 노래 잘할것 같아
-1999년 솔로 첫 앨범을, 2002년엔 록밴드 ‘활’에서 앨범을 냈잖아요. 아쉬운 것 없어요?
=솔직히 무대에 설 때 가장 행복해요. 그래서 제 자신에 대해 생각하면 가슴 아플 때가 있어요. 요즘엔 가수 친구들이 벽을 만날 때 같이 해결하면서 제 꿈을 이동해가는 거라고 믿어요. 앨범은 계속 내겠지만 공연이나 홍보 활동은 못할 거예요. 그러려면 이 일을 할 시간이 없겠죠. 제자들이 많으니까 앨범 내는 게 부담스럽기도 해요.(웃음) 제가 50살 정도 되면 그때서야 노래를 제대로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만큼 힘든 거예요. 그때가 되면 판소리를 해보고 싶어요.
-트레이너가 되려면?
=트레이너가 되려면 일단은 가수가 되려고 노력해야 해요. 현장에 나가서 연습하고 욕도 많이 들어야죠. 그래야 자기만의 방법이 쌓여요.
글·사진 김소민 기자
prettyso@hani.co.kr
가수들 노래 실력은
한국에서 인기 몰이를 하고 있는 가수들에 대해 보컬트레이너들은 어떤 평가를 내릴까? 스타일뿐만 아니라 어느 정도 노래 실력도 인정받고 있는 가수 6명에 대해 보컬트레이너 박선주·노영주씨에게 물어봤다.
에스지워너비 김진호의 노래 실력이 두드러진다. 힘 있는 발성을 들려주면서도 아르앤비 리듬과 높은 음역대를 소화한다. 김범수 이후 정통 발라드 계보를 이을 만하다.(박) 나이가 어린데도 표현이 풍성하다. 흉성을 내려고 호흡을 과도하게 쓰는 것 같다. 공기를 너무 목에 몰아치면 성대가 마르고 상처 입는다.(노)
비 프로듀서인 박진영과 비의 보컬 선생이던 임정희의 색깔이 많이 묻어난다. 보컬의 약한 부분을 춤 등이 보완해 왔는데 무대 경험과 함께 자신감이 쌓이면서 보컬도 탄탄해지고 있다.(박) 노래의 감성을 풍부하게 표현한다. 다만 음절을 끝맺을 때 호흡이 많이 새나온다. 끝소리를 제대로 내면 노래의 리듬이 더 살 듯하다.(노)
보아 기본 성악 발성법을 알고 있고 이런 저런 보컬 선생들을 거친 티가 난다. 그래서 다른 장르의 노래를 부를 때마다 갖가지 음색이 돋보인다.(박) 멜로디, 노랫말 하나하나 잘 표현한다. 하지만 목소리에 약간 답답한 부분이 있다. 목에 힘을 빼면 소리가 입안에 머무르지 않아 트인 느낌을 줄 것이다.(노)
세븐 얇고 힘이 없는 반면 리듬감은 돋보인다. 고음과 저음 사이 움직임이 자유롭되 음정이 흔들린다는 단점이 있다.(박) 목소리를 애써 두텁게 만들려하지 하지 않고 자기 소리를 낸다. 감성을 과장하지 않는다. 흉성과 두성을 자유롭게 이용하면 단조로움을 피하고 성숙한 분위기를 낼 수 있다.(노)
휘성 그의 생김새를 보면 칼 같은 목소리가 나올 법한데 현재 다소 굵은 편인 건 노력 덕인 것 같다. 일부러 목을 긁어내는 소리를 만들다간 성대가 다칠 수 있어 걱정된다.(박) 아르앤비를 자신만의 감성으로 잘 소화해 냈다. 턱에 힘을 좀 빼면 편하게 노래하면서도 소리엔 힘이 붙겠다.(노)
이수영 전통적이지도 유행을 타지도 않는 목소리다. 고음이 그다지 부드럽진 않지만 자기만의 색깔을 유지한다는 점이 높이 살 만하다. 최근 앨범에선 이수영표 목소리가 좀더 편안해진 듯하다.(박) 자신의 스타일이 있다. 다만 진성을 낼 때 성대를 완전히 붙이면 더 또렷하고 힘 있는 소리가 나올 것이다.(노)
김소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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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별 보컬 특징 뜯어보면
60년대는 “성악처럼” 80년대 가요창법 싹 터…이후 ‘개성 시대’ 열려
이미자·배호부터 ‘핑클’·‘에초티’까지, 한국인들이 사랑했던 보컬에서 거칠게나마 시대별로 특징을 잡아볼 수 있다. 보컬트레이너 김명기·노영주·박선주씨에게 보컬 변천사의 큰 줄기를 들어봤다.
1960년대: 성악의 짙은 영향력
소프라노처럼 노래해야 잘 한다 소리를 듣던 시대다. 이미자의 발성도 그렇다. 남녀 음역대가 확실히 갈려 있었다. 배호는 중저음 이상을 내지 않으며 테너·베이스 음역을 유지했다.(김) 이미자는 트로트를 불렀지만 목의 기교나 꺾기 따위를 많이 쓰지 않았다.(노)
60년대 말~70년대 초: 부드러움에서 격정으로
남진·나훈아의 활동이 왕성했을 때다. 둘다 엘비스 프레슬리의 영향을 받았다. 김추자도 그렇지만 앞시대의 안정적인 목소리를 넘어 역동적인 창법을 구사했다.(김) 남진·나훈아 모두 목을 많이 떨며 남성적인 목소리를 냈다. 상대적으로 남진은 남성다움 안에 부드러움이 있었다.(노)
70년대 중·후반: 영롱한 울림
송창식·윤형주 등 포크 가수들이 사랑받았다. 윤형주는 성악 테너 스타일로 불렀다면 상대적으로 송창식은 좀더 팝 가수처럼 노래했다. 목소리 결이 두껍고 울림 많은 ‘아날로그’ 목소리의 영향력이 컸던 시대다.(김) 통기타에 어울리는 깨끗한 창법이 유행을 탔다.(노)
80년대: 열창의 시대
조용필·이선희·구창모…. 진성으로 쭉쭉 뻗어나갔다. 성악의 영향력에서 벗어나 가요 창법이 싹을 틔웠다.(김) 80년대 초까지만 해도 기술이 크게 발전하지 않아 녹음 시스템이 까다로웠다. 스태프 가운데 한명이라도 틀리면 다시 진행해야 했으니 보컬도 기본기를 갖추고 완성된 뒤에야 욕 안 먹고 녹음에 참여할 수 있었다.(박)
80년대 중반~90년대 초: 빛나는 개성
이문세·신승훈·이승철·이승환…. 개성 강한 목소리가 비로소 물을 만났다. 80년대 초만 해도 노래하려면 판소리나 성악을 배워야 했다. 이때부터 타고난 목소리의 맛을 살렸다. ‘부활’, ‘시나위’ 등록밴드의 인기를 타고 진성으로 고음까지 올라가는 목소리들이 힘을 받았다.(김) 한국 팝의 르네상스가 열리는 시절이다. 여러 장르들이 나왔다. 기본기만 갖춰졌다면 발성·발음보다 개성이 높이 평가됐다.(박)
90년대 중반: 호황 속 불황
음반 판매량은 부쩍 늘었지만 음악은 퇴보했다. 90년대 초까지만 해도 적어도 악보 보고 악기 하나 정도 다뤄야 음악인이란 소리를 들었지만 ‘이미지와 콘셉트’의 시대에선 그런 것들이 필요치 않았다. 그래도 블루스의 감수성을 제대로 살린 김건모나 재즈 보컬로 갈고 닦은 이소라는 걸출한 가수다.(김) 노래는 듣지도 않고 가수를 뽑는 기획사들도 있었다. 녹음 기술도 발전해 보컬의 음정까지 교정이 가능해졌다. 가수의 자질이 문제가 되기도 했다.(박) 그때 수많은 댄스 그룹들이 생겨났지만 잊혀졌다. 결국 오래 기억되는 건 노래 잘 하는 사람들이다.(노)
김소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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