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6.02.15 22:53
수정 : 2006.02.15 23:11
발성 틀렸잖아 호흡 멈추고…
김명기, 박선주, 임정희, 비엠케이, 김연우…. 이들의 공통점은 가수이자 가수의 선생님이란 점이다. 1990년대 중반부터 ‘보컬트레이너’라는 낯선 이름을 달고 등장한 이들은 발성, 호흡 등 기초부터 깐깐하게, 때로는 무섭게 닦달하며 전문 영역을 다져갔다. 작곡가나 엔지니어 등이 ‘거기는 터트려줘’, ‘여기는 구슬프게’를 주문하며 특정 노래를 맛깔스럽게 부르도록 이끄는 것과 달리 이들은 몸을 악기처럼 다루는 기본적인 방법을 담금질한다.
이들의 활약은 클래식 성악 등보다 얕잡아보였던 ‘가요 부르기’가 배움의 영역으로 체계를 잡아가는 경향을 반영한다. 90년대 이후 뿌리를 내린 대학 실용음악과들과 보컬트레이닝 센터가 또 다른 방증이다. 넉넉히 잡아도 3~4년 사이 보컬트레이너에 대한 관심이 늘어난 데는 좋든 싫든 대중음악의 산업화도 한 몫 했다. 가수가 홀로 채찍질하며 크기보다는 키워지는 시대가 된 것이다.
지금 잘 나가는 보컬트레이너 대개는 가수이거나 가수였던 이들이다. 한 다리 걸쳐 후배들 돕는 식으로 시작했다 아름아름 알려진 경우가 많다. 마땅히 참고할 책이고 교육 기관이고 없다시피 하니 배우는 사람, 가르치는 사람 크게 구분 없이 머리 맞대는 궁리가 먼저였다. 1993년부터 보컬트레이너로 활동해 거의 마른 땅에 씨 뿌린 김명기(38)씨도 그런 경우다. 10년 넘게 ‘이 방법이 아닌가봐’ 시행착오를 겪으며 성악, 판소리, 음악엔지니어링까지 들쑤시고 다녔다. 휘성, 거미, ‘엠시 더 맥스’의 이수 등을 가르친 그는 보컬트레이너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장르 구분 없이 소리를 물고 늘어지는 거죠. 처음부터 끝까지 발성이에요. 노래 선생님이 한 가지 노래를 잘하는 법, 시험 잘 치르는 법 알려주는 ‘족집게’ 라면 보컬트레이너는 공식부터 설명하는 사람이죠.”
노래 선생님이 아니다…발성만 1주일 가르쳐
지금이야 ‘플라이 투 더 스카이’ 성시경 등에게 ‘선생님’ 대우 받는 노영주(34)씨지만 1997년께 아르바이트로 이 일을 시작할 때는 씁쓸한 일도 잦았다. “작곡가냐 트레이너냐에 따라 제작자들의 대우가 너무 달랐어요. 노래 가르치는 거야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처럼 여겨졌거든요. 발성만 1주일씩 하니까 ‘배운 것 없다’는 항의도 많이 받았어요.”
이런 시각이 본격적으로 바뀌기 시작한 계기를 2000~2002년께 보아의 등장과 성공에서 찾는 트레이너들이 많다. 김범수, 서지원, ‘동방신기’의 시아준수, 유진 등을 가르치고 지난해 <아포리즘>이란 앨범을 낸 박선주(36)씨는 “그때 보아를 아시아의 스타로 키워낸 시스템이 뭐냐는 데 관심이 쏠렸다”며 “보컬트레이닝도 개인 교습 수준을 넘어서 여기저기 교육센터도 생겼다”고 말했다. 그는 또 “90년대 중·후반 음반시장 호황 때는 외모만 되면 입만 따라하기(립싱크)도 받아들여졌지만 이런 가수나 이들을 내세운 방송 프로그램에 대한 비판이 제기되면서 라이브의 중요성도 다시 부각됐다”고 설명했다.
대형 기획사들은 신인 교육에 보컬트레이너의 참여 폭을 넓혀 갔다. 와이지엔터테인먼트 쪽은 “2년 전부터 전문 보컬 트레이너를 두고 있다”며 “시간을 낭비하지 않기 위해, 또 한번쯤 겪게 되는 침체기를 넘기는 데 도움이 되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에스엠 쪽은 “한 가수가 여러 보컬트레이너에게 배우게 한다”며 “보아는 미국과 한국을 오갔다”고 했다. 이어 “요즘엔 트레이너도 기본을 가르치는 사람과 아르앤비 등 장르 색깔을 보태는 사람이 따로 있을 정도로 세분화되는 추세”라고 덧붙였다.
휘성 보아 성시경…노래 잘하는 가수로 키워
스스로 보컬트레이너를 찾은 가수들도 꽤 많은데 노래 잘 하는 축도 예외는 아니다. 예컨대 휘성에게도 고민은 있었다. 그를 가르쳤던 김명기씨는 이렇게 회상한다. “정말 노력하는 가수죠. 천식에 비염까지 있어 노래하는 게 보통사람보다 더 힘이 드는 친구예요. 게다가 얇은 목소리를 두텁게 만들다보니 라이브를 힘겨워했어요. 호흡을 효과적으로 활용하는 법 등을 알려줬어요.” 박선주씨의 기억에 김범수는 ‘음치·박치’였다. “목소리 톤은 정말 독특하고 훌륭했어요.” 노영주씨는 데뷔하기 전 성시경을 당돌하면서도 수더분한 사람으로 떠올린다. “감미롭기만 하고 지루한 느낌이 있었어요. 목소리에 힘과 역동성을 보태려고 했죠.” 노영주씨에게 배운 가수 나윤권은 처음엔 “황당했다”고 한다. “누워 숨 쉬면서 어느 부분이 올라오는지 보라는 거예요. 뭐하는 건가 싶었죠. 한달 정도 지난 뒤에 사람들이 목소리가 달라졌다고 하더라고요.”
하지면 여전히 노래 잘 하는 가수가 가뭄에 콩 나듯 한다는 볼멘 소리는 여기저기서 터져 나오고 있다. 보컬트레이너들이 아쉬운 점으로 우선 꼽는 건 가수들이 다른 목소리를 흉내낸다는 점이다. 노영주씨는 “발성이 제대로 되고 노래를 잘 하는 사람들은 말할 때와 노래할 때 목소리가 같다”고 말했다. 강성연, 조앤 등과 작업한 배연희(30)씨는 “흑인 목소리를 흉내내느라 너무 많은 가수들이 성대를 망가뜨려 노래하고 있다”며 “개성을 잃을 뿐 아니라 길게 가지 못한다”고 안타까워했다.
근본적인 문제는 가수의 ‘유통기한’이 너무 짧아 기본기를 갖추는 데 소홀하다는 것이다. 트레이너들은 “훈련을 받더라도 앨범 컨셉을 소화할 정도에 그치고 그나마도 없이 특정 노래 기교만 빨리 습득하는 데 급급하다”고 지적한다. 이른바 ‘언더’에서 수년간 실력을 쌓아 ‘오버’로 올라오기보다는 급조되는 경우도 많다. “앨범이 뜨고 나면 잠 자는 시간도 없이 스케줄에 내몰려요. 메뚜기도 한철이라는 거죠. 그러면 성대가 가장 먼저 상해요. 또 노래 부르는 것도 전문직인데 17살 때부터 어떻게 제대로 하겠어요. 30살 넘어서도 꾸준히 앨범을 내는 사람들이 많아져야죠.”(노영주)
김소민 기자
prettys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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