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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6.02.16 11:08 수정 : 2006.02.16 11:13

1.

1990년 초 뉴욕의 겨울은 미동부 추위의 매서운 맛을 선보였습니다. 그 겨울, 뉴욕 업타운에 있는 비이콘 극장(Beacon Theater)에서 마일즈 데이비스의 공연이 있었습니다. 그의 전설적인 무대매너를 경험했습니다. 청중에게 등을 돌리고 아무런 인삿말이나 멘트없이 연주에 몰두하는 그의 모습. 그의 밴드 구성원들은 모두 약관의 젊은 뮤지션들이었습니다. 50, 60, 70년대에는 존 콜트레인(John coltrane)을 비롯해서 재즈 역사의 한 휙을 그은 기라성같은 뮤지션들이 그의 밴드를 거쳐갔습니다. 마일즈 밴드의 역사는 곧 현대 재즈의 역사라고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닐 겁니다.

2.

그 해 겨울, 비이콘 극장에서 공연한 마일즈 밴드는 지금도 제 마음에서 연주하고 있습니다. 젊은 연주자들과 죽음이 얼마 남지 않았던 노년의 마일즈-물론, 이듬 해에 마일즈가 세상을 떠날 줄 아무도 몰랐습니다-의 콤비네이션은 황홀했습니다. 그들의 협연은 세계 수준의 여느 필하모니가 빚어내는 음의 조화라도 흉내내기 어려운 강한 개성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들 각자의 연주 실력도 출중했고, 그들 나름대로 상당한 확신과 자부심으로 연주하고 있었습니다. 젊은 재즈 연주자들에게는 마일즈의 밴드에서 연주한다는 것 자체가 경이로운 경험이었을 겁니다.

3.

마일즈는 1949년 [Birth of the Cool]을 발표하면서 탁월한 백인 편곡자 질 에반스의 도움을 얻어 "쿨 재즈 (Cool Jazz)"라는 새로운 음악 장르를 개척합니다. 이 앨범의 등장으로 비밥 (Be Bop) 재즈의 전성기는 종언을 고하기 시작합니다. 재즈 역사에서 마일즈에 못잖은 또 다른 거장 디지 길레스피(Dizzy Gillespie)는 [Birth of the Cool] LP를 반복해서 듣다가 망가뜨립니다. 그 음반에 그가 얼마나 놀라운 음악적 충격과 매력을 경험을 했는지 증명해주는 해프닝입니다. 쿨 재즈의 성공 이후, 아직 20대의 마일즈는 마약에 빠져들기 시작했고, 그의 음악활동도 쇠퇴의 기미를 보입니다. 그러나, 1955년 무렵부터 그는 마약중독을 극복하고 1956년에 존 콜트레인과 더불어 명반 [Round About Midnight]을 발표하고, 1958년에 뉴욕 주의 New Port Jazz Festival 무대에서 완벽하고, 화려하게 재기에 성공합니다. 마일즈 밴드가 1959년에 발표한 [Kind of Blue] 음반은 미국 대학생들의 문화적 교양을 상징할 만큼 그의 음악은 대중 가운데 높은 평가를 받습니다. 그가 뉴욕 그리니치 빌리지의 대표적 재즈 무대인 "블루노트"에서 연주할 때, 폴 뉴먼, 제임스 딘 등 저항적 이미지의 당대 청년문화의 아이콘들이 그의 연주를 들으려 밤마다 모여듭니다.


4.

그러나, 1960년대 비틀즈의 등장과 함께 재즈 음악은 대중의 외면을 받기 시작하고, 마일즈 데이비스는 미국 대중음악의 우상적 지위를 잃어갑니다. 그는 재즈에 비해서 음악적 표현이 열등해보이는 락뮤직에 대중이 몰려가는 것에 좌절합니다. 그러나, 마일즈는 세월을 불평하는 데 그치지 않고, 대중의 변화하는 취향을 인식하고 새로운 장르의 재즈 음악을 개척하여, 1969년에 명반 [Complete Bitches Brew Sessions]을 발표합니다. 이 음반은 이전에 나온 또 하나의 명반 [Silent Way]와 더불어서 퓨전 재즈의 시작을 알립니다. [Complete Bitches Brew Sessions]는 재즈 역사상 가장 많이 팔린 음반으로 기록됩니다. 마일즈는, 이 음반이 나온 이듬 해, 1970년에 재즈 락 장르의 명반 [Tribute to Jack Johnson]을 발표합니다. [Tribute to Jack Johnson]은 당시 미국 사회를 뒤흔들던 민권운동의 표어-"검은 것은 아름답다 (Black is beautiful)"의 메시지를 강렬하게 표현합니다. 60년대를 거치고 70년대에 들어서면서 미국 사회 형편에 흑인이 자신의 아름다움을 각성하기 시작한 것은 혁명적이었습니다. 흑인 민권운동의 역사와 더불어 마일즈 데이비스의 음악은 혁명적 변신을 거듭합니다.

5.

마일즈 데이비스의 재즈 역사는 미국 사회의 사회문화적 환경과 대중의 취향과 따로 떼어서 생각할 수 없습니다. 그는 "오직 음악만으로"의 논리에 머물지 않았습니다. 마일즈는 연주 생활 초기에 음악은 음악 그 자체로서 의미가 있다고 주장하는 순수 미학적 입장을 지키면서 음악에는 흑백 간의 벽이 있을 수 없다고 믿지만, 연륜을 거듭하면서 미국 사회에서의 인종차별의 벽을 실감합니다. 그는 마침내 뿌리를 잃고 방황하고 타락하는 흑인 청소년 교육을 위한 도구로 재즈 음악을 사용할 것을 역설하면서 음악의 사회정치적인 의미를 깨닫고 음악하는 외적 환경에 눈을 돌립니다. 마일즈가 무대에 올라서서 청중에게 등을 돌리고 연주하기 시작한 것도 그 청중의 대다수인 백인들에 대한 반감에서 나온 것이고 그의 연주 환경의 사회성을 인식한 결과입니다. 미학적 탁월함과 사회적 진보를 함께 이루는 것은 문화의 나아갈 방향이기도 합니다. 마일즈 데이비스는 악보와 사회 그리고 문화를 함께 읽어낼 줄 알았던 위대한 음악인이었습니다.

6.

마일즈 데이비스는 1991년에 그의 마지막 앨범, [Doo-Bop]에서 뉴욕 거리의 소음을 그대로 옮겨 그 거리 풍경을 생동적으로 힙합 형식에 담아 표현하는 새로운 재즈를 시도합니다. 그의 노년 나이에도 그의 감수성은 힙합 제너레이션의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마일즈는 그 앨범이 세상에 선보이기 전, 여름 날, 몸에 이상을 느끼고 캘리포니아의 한 병원에 실려가면서, 그의 앨범 제작에 협력한 젊은 친구에게 "튠업(tune-up) {자동차 엔진이 힘을 잃어갈 때 엔진을 파워풀하게 하는 작업}"을 하러 간다는 말을 남기는 여유를 보였지만, 그것이 그가 세상을 떠나는 길이 되었습니다. 마일즈는 끊임없는 음악적 변신을 통해서 세상을 "튠업"시키려 했던 인물인지도 모릅니다. 미국의 대중 사회는 카멜리온적인 그의 음악적 변신을 통해서 쉬임없이 문화적, 사회적 "튠업"을 경험해왔습니다.

7.

오마이뉴스에 따르면 창비 40 돌을 맞아서 창비는 일신의 각오로 오는 "4월부터는 젊은층과의 일상적 대화와 현장성 강화를 모토로 '창비주간논평'을 온라인으로 발행"할 것이라고 합니다 (한겨레도 이 내용을 보도했습니다). 특히, 1966년에 창비가 세상에 등장하고 나서 지금까지 창비의 정신적, 실질적 지주이신 백낙청 편집인 선생께서 "운동성"을 강조한 것은 의미있는 일입니다. 그것은 창비가 대중 한복판에 뛰어들어, 변화하는 문화적 환경에 대응하여, 대중과 대화하겠다는 선언으로 들립니다.

8.

60년대에 창비가 출현한 이후 1987년 6월 항쟁에 이르기까지 창비의 리얼리즘은 텍스트에 머무르지 않고, 텍스트와 현장을 연결시킬 줄 아는, 대중과 함께 역사 한복판에서 호흡하는 생동감있는 리얼리즘이었습니다. 그 시절, 창비를 읽었던 것은 그 안에 리얼리티가 생생하게 꿈틀되고 있기에 그러했습니다. 독재 파쇼정권은 문인들을 비롯한 지식인들에게 텍스트에만 머무를 것을 물리적 힘으로 강요했지만, 창비는 텍스트와 현장의 소통, 그리고 궁극에는 현장의 변혁을 추구했습니다. 그러기에, 창비는 불온했습니다.

백낙청 선생님께서 창비의 지성인들이 폭압적 독재정권 아래의 극한 상황에서 고난을 통과하던 60년대 이후 80년대에 이르기까지의 시절을 회상하면서 "탄압은 창비를 키운 힘 중의 하나"라고 언급하셨습니다. 이는 창비의 리얼리즘이 텍스트 안에서 그친 것이 아니라 역사적 현장체험과 함께 해온 것임을 함축하고 있습니다. 창비가 한국 사회를 "튠업"시키는 사회적 문화적 진보의 아이콘이 된 것은 바로 이런 리얼리즘의 힘이었습니다.

9.

그런데, 창비 40돌에 나온 백낙청 선생님의 선언이 유난히 새롭게 들리는 것은 왜 일까요? 그것은 아마 창비가 한국 사회를 "튠업"시키던 그 리얼리즘의 힘을 상실했기 때문일 겁니다. 창비의 최원식 전 편집주간은 2001년에 나온 한국 비평문학의 역작으로 꼽히는 그의 작품 [문학의 귀환]에서 90년대 이후 "지리멸렬"해진 문학을 새롭게 하기 위해 "문"과 "학," 다시 말해서, "창작"과 "비평"의 영역에서 동시에 "독자적 방식"을 닦아가야 할 것을 역설했습니다. 제게는 최원식 교수님의 이 논리는 마치 르네상스 시대로의 귀환을 주장하는 것처럼 들렸습니다. 최 교수님은 "최고의 문학"을 위해서 80년대까지만 해도 대립되는 것처럼 보였던 "리얼리즘과 모더니즘의 회통"을 주장합니다. 발테르 베냐민이 이해하듯이 언어는 근본적으로 사물에 이름을 부여함으로 저자의 실존적, 내면적 정신 세계를 전달하는 역할을 수행하고 있기에 "리얼리즘과 모더니즘의 회통"은 이미 위대한 문학의 특징이 되어 왔습니다.

10.

저는 창비의 탁월한 리얼리즘의 전통은 "창작"과 "비평"이나 "리얼리즘"과 "모더니즘"의 회통에서 회복될 것이 아니라 "가난한 마음"으로 "가난한 자"들이 거하는 역사적 현장으로 내려와 텍스트를 읽고 쓰는 작업이 있을 때 비로소 회복되리라 믿습니다. 창비가 텍스트를 통해서 형성된 권위와 권력에 안주해왔기에 우리 시대의 대중 곁에서 과거의 권위를 얻지 못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입니다.

60년대 이후 창비의 역사는 우리 지성과 문화의 역사였고, 창비 출신 문인들과 지식인들은 그들 권위를 쉽게 인정받아왔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창비는 신세대 문인들과 지식인들에게마저 한결같이 꿈의 무대입니다. 창비의 지성이 이런 권력적 속성에 안주하지 말고, 아무쪼록, 텍스트를 너머서 현장에 육화되는 운동성을 회복하여 한국 사회를 거듭 "튠업"시키는 새 시대를 열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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