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6.02.21 20:46
수정 : 2006.02.21 20:46
날카롭게, 그윽하게 회화 역사에 문자향 입혔다
“74년 유학에서 돌아왔을 때 이땅에 미술사 박사 10명만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했어요. 30여년 뒤 그 꿈의 수치를 훨씬 넘어 숱한 박사급 후배들이 활약하는 것을 보면서 정년을 맞습니다. 이런 행복이 있겠습니까. ”
28일 정년퇴임식을 여는 안휘준(66)서울대 고고미술사학과 교수(문화재위원장)는 “난 정말 운이 좋다”고 되풀이했다. 안 교수는 “좋은 스승, 제자들과 인연 맺는 행운이 줄곧 따라다녔다”며 두가지 큰 ‘행운담’을 말머리로 풀었다.
“한국 전쟁으로 2년간 초등학교를 못 간 게 첫번째 큰 행운이죠. 왜냐구요? 덕분에 61년 생긴 서울대 고고인류학과 첫 입학생이 됐지요. 원래 상과대를 가려했는데 평생 장부 끼고 살 자신이 안 섰어요. 마침 학과 창설 소식을 듣고 새 학문 개척자가 되겠다는 마음에 데꺽 지원했지요. 전쟁으로 학업이 늦춰지지 않았다면 미술사가는 꿈도 못꿨을 겁니다.”
조선 회화사를 전공한 그는 국내에서 진경산수에 천착한 최완수 간송미술관 연구실장과 더불어 한국 미술사학의 양대 산맥이다. 고대부터 조선말까지 전통 그림의 시기별 역사를 중국과의 교류 관계 속에서 근대적 시각으로 나누고, 양식·화풍별로 체계화한 것은 그의 노력에 힘입은 바 크다. 〈몽유도원도〉를 그린 안견의 화풍과 소상팔경도(瀟湘八景圖)의 계보를 분석한 것도 그다. 스테디 셀러 〈한국회화사〉를 비롯해 〈한국회화사 연구〉 〈신판 한국미술사〉 등 28종 저서 상당수는 후학의 교과서가 됐다. 숱한 제자들은 학문적 논리성과 사료성을 따지는 스승의 ‘서릿발 카리스마’를 기억한다. 출석 부를 때 “예”대신 “네”라고 답했다고 호통 치거나, 청강생도 기말시험을 본 후 이를 바탕으로 평가했다는 일화도 있다.
척박한 현실 뚫고 한국미술사 계보 밝혀
청강생도 시험보게해…“제자있어 행복”
충북 진천의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난 그는 학교 갈 날만 손꼽아 기다렸다는 고학생 출신. 인류학에 관심 있던 그가 미국 하버드대 미술사 박사학위를 받고 미술사가가 된 것은 두번째 큰 행운을 만난 덕분이라고 한다. “초대 국립중앙박물관장이던 여당 김재원 박사가 65년 서울대에 고고학 강의를 나왔어요. 수강하던 저를 어여삐 보셨는지 미국 가서 맘에 없던 미술사를 공부하라고 권하시더군요. 고민하다 스승 김원룡 선생의 조언을 듣고 유학을 결심했습니다. 여당은 입학 알선은 물론 록펠러 장학기금까지 연결시켜주더군요.” 67년 시작한 유학생활은 돌밭길이었다. 까다로운 어학시험에, 생소한 동서양 미술사를 익히려니 너무 힘들어 고고학 전공으로 바꾸겠다고 여당에게 편지까지 보냈다. “척박한 국내 학계의 기반을 닦으라는 여당의 간곡한 답장에 다시 맘을 고쳐먹었지요. 결국 조선초 산수화를 주제로 박사학위 논문을 썼습니다.”
그는 74년 귀국 뒤 공채교수 1호로 홍익대에서 9년간 봉직하다 83년 고고미술사학과로 바뀐 서울대로 옮겼다. 전문 개론서도 없고, 갈무리되지 않은 작품 사료들만 널렸던 초창기 연구의 어려움을 ‘최선을 다하지 않으면 죄악’이란 신념으로 헤쳐왔다고 했다. 미술사 선구자의 사명의식 때문에 “비행기도 함부로 타지 않을 정도”로 몸조심을 했다는 회고다. 지금도 미술사료 수집을 위해 화랑가 현대미술전시까지 ‘꼬박꼬박’‘심각하게’ 감상한다. 제자 유홍준 문화재청장의 권유로 다음달 명지대 석좌교수로 강의를 계속하는 안 교수는 새 저술에도 조바심을 내비쳤다. “한국 미술사와 회화사, 미술사 관련 논문집의 영문판을 아직 못 냈어요. 그 책들이 나와야 게으름도 피울 수 있죠. 틈틈이 내키는대로 돌아다닐 생각도 합니다만…”.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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