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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6.02.26 19:05 수정 : 2006.02.26 19:05

천국에도 책방 차리셨나요?

‘헌책방계의 신사’로 불리는 삼우서적(서울 관악구 소재) 주인 유길종(64)씨가 지난 14일 타계해 주위를 안타깝게 하고 있다. 신림 9동에서 지금의 자리인 낙성대 입구로 이사하면서 책짐을 무리하게 옮긴 게 직접 원인이 되어 3년여 동안 기관지확장증으로 투병을 하다가 끝내 일어서지 못한 것. 그의 부인 이영자(60)씨는 오랫동안 헌책방을 하면서 먼지를 마셔서 생긴 직업병 같다고 말했다. 전남 고창에서 17, 8세에 상경해 청계천의 한 서점 점원으로 헌책방 일을 시작한 이후 봉천동 고개, 봉천동 사거리, 신림9동, 낙성대 근처를 옮겨다니며 ‘삼우서적’ 간판을 달고 40여년동안 책손님들에게 책을 공급해 왔다. 그는 ‘국졸’임에도 독학으로 공부해 한문과 영문은 물론 독, 프, 일문을 독해하여 각계각층의 고객이 원하는 책을 찾아내 응대한 것으로 전해진다. 다른 책방주인들이 책을 사고팔 때 서지나 가격 등을 물을 정도로 헌책방계에서 그의 박식함은 널리 알려졌다.

청계천 점원으로 출발 40여년 ‘책 사랑’
국졸로 영·독·프·일어 독학 ‘서적상 스승’
좋은 책 제값 주고 희귀본 비싸게 안팔아

유씨의 책 욕심은 별달라 책이 있다면 시간과 장소를 가리지 않고 달려가 샀다고 한다. 특히 좋은 책이 나오면 돈을 빌려서라도 사들여 구색을 맞췄고 구입한 책들은 닦고 붙이고, 사포로 문질러 새책처럼 만들었다. 결혼과 함께 책방일을 도와온 부인 이씨는 남편이 구입한 책을 바로 책꽂이에 꽂는 것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다고 말했다. 그는 젖은 책은 갈피마다 다른 종이를 끼워 말리고 다림질을 했고 중간에 떨어진 페이지가 있으면 반드시 책밑에 ‘O페이지 결’이라고 표시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쓰레기가 되지만 일단 복원해 공급하면 필요한 사람한테는 귀중한 자료”라면서 “수고비도 안 나온다”며 만류하는 아내를 달랬다.

1974년 책방을 시작할 때 유씨한테서 책을 생명 대하듯이 예우하는 태도를 배웠다는 인천 아벨서점 주인 곽현숙(55)씨는 “그 분의 엄지손가락은 물걸레와 본드에 절어 늘 째지고 갈라져 있었다”고 전했다. 특히 “그분은 책을 통해 도를 닦는 것처럼 느껴졌다”면서 그의 죽음을 안타까워했다.

삼우서적 주인 고 유길종씨는 책-손님 중간에서 충실한 전달자 역할을 자임해 왔다. 고인은 생전에 서울 봉천동 낙성대의 헌책방에서 책의 숲에 파묻혀 휴일도 없이 일하곤 했다. 최종규씨 제공
20여년 이 책방을 다닌 용낙현(63·백산학회 총무)씨는 “봉천동 고개 시절 헌책방으로서는 전국에서 가장 컸다”면서 “돈에 구애받지 않고 좋은 책을 구해줘 많은 도움을 받았다”고 회고했다. 희귀본이면 비싸게 파는 통례와는 달리 수고비만 받고 필요한 사람한테 넘겼으며 이로 인해 근현대 역사 및 문학 연구자들의 출입이 잦았다고 덧붙였다. 또다른 단골은 “그 책방은 헌책방 같지 않았다”며 책을 찾으면 어디선지 단번에 뽑아다 줌으로써 손님들 사이에서는 컴퓨터로 통했다고 전했다. 80년대 초 이 책방을 출입한 최불초(헌책방 ‘할’주인)씨는 “당시 금서 및 희귀본 구입능력이 탁월한 분이었다”고 회고했다.

그는 또 평소 책은 반드시 제값을 주고 사고 팔아야 한다는 지론을 폈다. 구입할 때는 파는 사람이 값을 싸게 말하더라로 스스로 값을 산정해 치러 헌책방계에서는 ‘신사’라고 불렸다. 그 탓에 중간상이나 다른 책방에서 좋은 책을 아껴두었다가 유씨한테 공급해 주었다. 자신이 책을 구하러 일일이 돌아다니지 않아도 그렇게 해주니 되레 고마워했다고 전한다.

그의 책방이 쉬는 날은 일년에 두 차례, 설과 추석이었다. 명절이어도 특별한 일이 없으면 문을 열 정도로 책방에 살았다. 부인 이씨는 “장례 뒤 옷장을 정리하니 변변한 옷 한벌 없더라. 다른 취미생활이 전혀 없는 남편은 책과 함께 지내는 시간이 가장 행복해 보였다”고 전하고 “천국에서도 책을 사고팔 양반”이라고 말했다.

그의 집에는 책으로 넘쳐났으나 투병하는 동안 대부분 처분한 것으로 알려졌다. 부인 이씨는 책방 일이 힘들어 그만 둘 생각이지만 남편이 정성들여 짠 책장과 일일이 손이 간 책들을 헐값에 처분할 수 있을지 걱정스럽다고 말했다. 유족으로는 부인 이씨 외에 유지숙(35), 승훈(29), 승준(27)씨 등 3남매가 있다. 그의 형 유화종(66)씨 역시 청계8가에서 헌책방 일문서점을 운영하고 있다.


임종업 기자 blitz@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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