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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6.02.28 20:03 수정 : 2006.02.28 20:03

밤·낮 경계선이 소멸된 서울의 밤문호에는 근대화 100녀의 사연이 깔려 있다. 위로부터 100여년 전 막 ‘머리를 얹은’ 앳된 기생들. 1690∼70년대 일탈과 욕망의 해방구 카바레, 82년 1월6일 통금해제 직후 시작된 야경관광, ‘국민 놀이터’ 인 노래방. 생각의나무 제공

명월관∼딴스홀∼588∼카바레∼고고장∼룸살롱∼노래방∼
기사·증언 담은 ‘서울의 밤문화’ 나와

“찜질방 22%가 서울에. 100명 이상 큰 규모 281곳. 노래방 3만5000곳 가운데 6500여곳 서울 소재. 강남 룸살롱, 폭탄주 일상화. 두타 밀리오레 등 야간쇼핑이 전체 매출의 절반.” 서울 밤문화의 오늘이다.

<서울의 밤문화>(김명환·김중식 지음, 생각의나무 펴냄, 1만7000원)는 서울의 지난 100년과 현재의 밤풍경을 집약했다. 당시 신문기사와 원로 인터뷰가 주재료.

‘밤의 꽃’ 기생단체의 효시는 1911년 관기 출신 30명으로 만든 다동조합. 1914년 권번으로 바뀌었고 서울에는 한성, 대동, 경천, 조선권번 등이 있었다. 평균나이 17~18살, 출장비는 1시간에 1원50전. 1909년 명월관이 요릿집 1호. 궁중 출신 기생·요리사·악사들과 일본의 요정문화의 접점으로 기생인명록인 <조선미인도감>을 비치했다. 로맨스는 물론 애국지사 비밀 연락장소로 쓰였다. 1918년 불탄 뒤 대이은 ‘태화관’은 1년뒤 독립선언서 낭독으로 영업정지, 며칠 뒤 원인모를 화재로 퇴출됐다.

1930년대 청계천을 경계로 남촌(충무로, 명동)은 서양식 카페와 술집, 북촌(종로통)은 선술집과 빙수가게가 성업했다. 모던보이·모던걸의 주무대는 일본풍물이 이식된 남촌이었다. 1933년 만주사변 이후 ‘딴스홀’이 불허되자 관련자들이 탄원서를 내기도 했다. 해방~1982년은 ‘야간통금시대’. 무려 37년이다. 통금에 쫓긴 고속음주, 차잡기 전쟁, 어쩔수 없는 여관행이 벌어졌다. 종3과 588은 숏타임-긴밤 메뉴가 두 개. 청진동 해장국집은 통금에서 풀린 쌍쌍족으로 성시였다. 크리스마스, 제야 그리고 대통령 취임식날은 손꼽히는 통금해제일.

60년대에는 왕대포집, 니나노집에 이어 바, 비어홀, 위스키시음장 등 서양식 술집이 등장하고 5·16정변과 함께 요정문화가 활성화됐다. 1965년 쌀막걸리 금지로 서민들은 포장마차에서 참새구이에 소주를 켰다. 요정으로 삼청각, 선술집으로는 명동의 은성이 유명짜. 70년대 어른은 카바레, 젊은이는 고고클럽에서 일탈과 해방을 구가했다. 카바레에서는 주부들 대신 웨이터가 장을 봐 주었고 종종 불을 꺼 키스타임을 삼았다. 고고장은 무교동 ‘스타다스트’, ‘코파카바나’가 쌍벽. 1500원으로 밤새 춤을 추었다. 위스키시음장은 성냥개비로 잔술을 세고 국산위스키는 ‘골때렸다’. 극장은 ‘금연’ ‘탈모’ 표시등에 임검석이 있었고 변두리 삼류극장은 지린내가 왕동해도 하루종일 죽칠 수 있었다.

청량리, 용산 등의 사창가는 일본 공창제의 잔상으로 청일전쟁때 만든 묵정동 일본군 전용 유곽이 시초다. 1904년 일본인 요정업자들이 일반인용으로 ‘쌍림관’을 개설하면서 서울 전역으로 퍼졌다.

임종업 기자 blitz@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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