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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6.03.22 14:55 수정 : 2006.03.22 14:55

(브라질 상파울로)


<국화와 칼>이라는 책에는 “일본인은 죄의식은 결여되어 있는 대신 수치감을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서양인들에게 아직 동양 민족의 차이점과 민족성을 제대로 구분 못했던 2차 대전 중에 미국인 루스 베네딕트여사가 일본에 가보지도 않고 단지 연구실에서 쓰고 후에 객관적으로 일본을 서술했다는 평을 들은 책이라 합니다.

죄는 개인 속에서 생겨나는 개인의 내적 문제인데 비해, 수치심은 주위의 평가에 의해서 생겨나는 것입니다. 동양의 처세술은 서양의 처세술에 비해 타인 지향적임을 말하는 글인 것도 같습니다. 행복의 기준이라든가 성공의 기준이나 삶의 기준이 타인의 나를 보는 시각을 기준으로 설정이 됨으로 서구인의 눈에는 균질적이고 획일적이고 개성이 부족하게 느껴진다 합니다.

나는 서양과 동양의 사고 방식의 가장 큰 차이점을 주소 적는 방식에서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한국은 나라이름으로 시작하여 도 이름, 시 이름 후에 개인주소번호를 맨 나중에 적는 식이나 서양은 개인 주소번호를 시작하여 시, 주 이름, 나라이름으로 끝을 맺습니다. 이 차이를 때로는 외향성과 내향성으로 이해하여 그 둘의 역사적 차이를 이해할 수도 있을 것이고 어떤 때는 자기 중심과 타인 중심의 사고 차이를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누구는 문 열고 들어가는 방식도 틀리다 합니다. 이곳은 방에 들어갈 때 밖에서 안으로 열고 들어갑니다만 한국은 어떤지 궁금합니다.

어떤 심리학자의 글에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내가 나를 막는 것이 나의 비극이다. 내가 좋아하면서도, 내가 하고 싶으면서도 남이 어떻게 볼까봐 하지 못하는 것들이 많을 때, 때로는 내가 하고 싶지 않으면서 남의 체면상 거부하지 못하고 행할 때 나는 불행하다. 내가 하는 행동을 내가 좋아하느냐 좋아하지 않느냐, 하고 싶으냐 하고 싶지 않으냐가 아니라 타인이 어떻게 볼 것 같으냐에 맞추어 하다 보면 나는 없어지고 타인만이, 아니 더 정확히 말해서 '내가 생각하는 타인'만이 남게 된다. 즉, 사람은 없어지고 관념만이 남아 나를 지배하게 된다. 그것이 실존적 공허이고, 우리 불행의 본질이다.”

개인적인 경험으로 이민와서 겪게 되는 가장 큰 갈등의 하나가 바로 이 처세의 차이가 아닌가 생각됩니다. 타인지향적으로 타인을 의식하고 살아야 살아남을 수 있고 때로는 끈끈한 정으로 똘똘 뭉친 그런 한국의 조직사회나 인맥사회에서, 철두철미하게 냉정하고 냉혹한 무한 개인 책임 사회인 이민사회에서 겪게 되는 그 처세의 차이가 이민자에게는 보통 스트레스가 아닐 수 없습니다.

나는 개인주의적이고 좀 말초적이고 이해타산적이고 좀 이기적이라 할 수 있는 서양의 처세론이 무조건 낫다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그렇다고 내가 이민을 나와 잘살고 있다거나 처세를 잘하고 있다는 이야기도 아닙니다. 오히려 극단적인 차이의 중간에서 그 차이를 깨우치고 오히려 외롭다는 표현이 맞을 것 같기도 합니다. 그리고 그 외로움을 이 인터넷 세상에서도 느끼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나는 동양과 서양의 것이 좀 절충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내가 생각하는 종교의 처세술…… 불교에서 말하는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하는 말과 기독교에서 말하는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따라오라 하는 처세 방법이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무슨 의미로 이해가 되어야 하는지 그리고 진실로 자신의 행복과 타인을 배려하는 처세술이란 어떤 것인지 궁금해지고 생각하게 하는 요즘입니다.

*참고: 이민 사회에서의 세대 차이 단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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