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6.04.04 21:40
수정 : 2006.04.04 21:56
김형국 교수, 국궁 역사·문화 총정리한 ‘활을 쏘다’ 펴내
정조는 신궁이었다. 50대를 쏘아 49대를 맞힌 일이 열두 차례. 50대를 전부 맞힌 기록은 없다. 왜 그럴까?
서울대 환경대학원 김형국 교수가 활쏘기의 문화와 역사를 아우른 <활을 쏘다-고요함의 동학, 국궁>(효형출판 펴냄)을 썼다. 지은이는 3년 전 예순을 넘은 나이에 활을 처음 잡아 이제는 매일 아침저녁 황학정에 올라 활을 쏘는 열성궁사다.
지은이는 고대 중국의 병서와 우리나라 문헌을 훑어 활이야말로 역사적으로 우리가 꽃피운 문화임을 밝히고 있다. 우리 민족을 이르는 동이족의 이(夷)가 대(大)와 궁(弓)의 합성어다, 고구려 시조 ‘주몽’ 역시 ‘활 잘쏘는 자’라는 뜻의 보통명사다, 당태종이 고구려 안시성주 양만춘의 살에 애꾸가 되었다는 등의 역사를 환기시킨다. 또 활쏘기가 단순한 무사들의 무예가 아니라 선비들의 득도의 길이었음을 지적한다. 정조의 경우 완벽한 경지에 이르면 다음은 그보다 못할 수밖에 없기에 마지막 한발은 빗맞혔다는 것이다.
지은이는 이밖에 근대 활쏘기의 요람인 황학정의 역사, 활, 화살, 활쏘기대회, 인간문화재 궁사 등 국궁문화 현장을 꼼꼼히 기록했다.
과녁이 검은 사각형과 붉은 원형 두 가지였는데 일제가 일장기와 닮았다는 지적함에 따라 ‘사각형안 붉은 원’의 형태로 변했다는 일화, 사극이나 역사영화에서 등장인물들이 양궁식으로 활시위를 당기는 것은 깍지의 존재를 몰라서 빚어진 것이라는 지적은 새롭다.
임종업 기자
blitz@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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