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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6.04.26 19:41 수정 : 2006.04.26 19:41

재일동포 서경식 교수 평론집 ‘난민과 국민사이’

해수욕인가…? 속옷 차림의 여인들이 다섯. 왼쪽 끝에 선 소녀는 엄마로 보이는 여인 등 뒤로 머리를 숨기고 있다. 얼핏 보면 “이봐요, 잘 찍어줘요”라고 말을 거는 표정 같기도 하다. 그들 뒤에는 벗어놓은 옷들이 쌓여 있다. 그런데 저 멀리 제복 차림의 사내들이 보인다.(오른쪽 두번째) 다음 장면은 벗은 여인들이 가슴을 가리며 함께 어디로 향하고 있다.(세번째) 그 다음 사진엔 큰 구덩이(골짜기) 비탈 위에 벗은 차림의 사람들이 저쪽을 향해 서 있고 그들 뒤 아래쪽엔 뭔가가 어지러이 무더기로 쌓여 있다. (아래)

〈난민과 국민사이〉(돌베개 펴냄)는 1부 첫 장면이 이런 3장의 사진과 함께 시작된다. 구덩이 아래쪽에 쌓여 있는 것은 무수한 주검들이며 수줍은 듯한 표정의 여인들은 해수욕 준비를 하는 것이 아니라 총살당하기 직전의 유대인들이었다. 1941년 소련 서부지역에서 나치 독일의 유대인·민간인 학살전담부대 아인자츠그루펜의 무차별 학살에 희생당한 사람은 120여만명에 이른다. 이 책의 저자 서경식(맨 위) 일본 도쿄경제대학 교수가 라트비아의 리예파야 야드바셈박물관에서 본 그 사진들은 바로 당시 자행된 대학살의 현장 가운데 하나였다.

서 교수는 그 충격적인 사진들을 보는 순간 “격렬한 수치감”에 온몸을 떨었다. 그것은 “‘인간’이라는 존재가 실제로 보여준 극한의 냉혹함과 둔감함”을 증언하는 말 그대로의 ‘기념사진’이었으며, “핏기 없는 시체들이 포개진 구덩이는 우리가 흔히 ‘인간성’이라고 부르는 통념이 여지없이 단절되는, 찢긴 틈새”였던 것이다.

‘어머니를 모욕하지 말라’라는 제목이 붙은 책 1부는 그의 평론집 〈반난민의 위치에서〉에 수록된 글이다. 〈난민과 국민사이〉는 이 책과 또다른 평론집 〈분단을 살다〉, 〈저울질하지 말라〉에서 골라낸 글들을 엮은 것이다. 1990년대 중반 이후 최근까지 사유하고 발언한 궤적들이다. 〈나의 서양미술 순례〉나 〈소년의 눈물〉, 〈디아스포라 기행〉 등 그가 쓴 에세이류들은 여러 권 번역 소개됐으나 “재일조선인론, 역사인식의 문제, 국가론, 민족론 등을 다룬” 그의 평론들은 〈전후책임론〉 등으로 한국에도 알려진 다카하시 데쓰야 도쿄대 교수와의 공저 〈단절의 세기, 증언의 시대〉 정도를 빼고는 이땅에 제대로 소개된 적이 없었다.

민족 차별의 경계에 일상적으로 노출돼 있던 재일동포 2세인 그가 리예파야 학살에 그토록 전율한 것은 바로 자신이 속한 재일동포를 비롯한 사회적 소수자(마이너리티)가 일상적으로 당하고 있는 인간 차별과 모멸, 그것이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세계의 실상이 본질적으로 그와 다르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것은, 16살에 일본군 위안부로 끌려간 재일동포 송신도 할머니가 전후 일본 사회에서 당한 상상하기 어려운 굴욕,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살아 돌아왔으나 “수용소 밖의 세계 또한 수용소라는 것”을 깨닫고 인간이라는 존재에 대한 수치심 때문에 자살해버린 프리모 레비 등 그가 추적하고 만난 숱한 유·무명인들의 구체적인 삶, 그리고 식민지배와 분단 모순의 산증인인 저자 자신의 기구한 가족사를 통해 선연하게 확인되며 자근자근 되새김질된다.

서경식은 자신의 글이 탄광 갱내의 가스위험을 알리는 ‘카나리아의 비명’이기를 겨냥한다. 그가 보기에 재일조선인이란 기구한 역사의 피조물들이 일본만이 아니라 조국 사람들에게도 카나리아와 같은 존재다. 만연한 위선과 거짓, 무관심과 불신으로 뒤집힌 세상에서 연약한 듯하면서도 두려움을 모르는 불퇴전의 전사처럼 싸우는 서경식의 섬세하고 깊은 사유는 복음일 수 있다.

한승동 선임기자 sdh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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