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삽화 이보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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콩트 - 어게인, 어게인
“제가 사우디아라비아까지 갔다 온 사람입니다.” 한솔이 아버지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자식 똑바로 키우라는 일장연설을 막 끝낸 한솔이 담임선생님 앞에서 뜬금없이 사우디 얘길 꺼냈다. 한솔이 아버지가 돌아가고 나서 담임선생님은 한솔이의 코를 세게 잡아 비틀었다. “너네 아버지는 사우디 가서 돈 벌었는데, 너는 자식아 이 성적으로 어디 갈래? 이 성적으로는 사우디도 못 가 이 자식아.” 한솔이의 문제는 입시를 앞두고 단순히 성적이 떨어졌다는 데 있는 게 아니었다. 한솔이는 좀 특이했다. 아무 탈 없이 잘 다니고 있는 학원 분위기에 문제가 있다고 바람을 잡아 ‘학원생과 학원 선생님과의 대화시간’을 마련하지 않나, 일본의 어느 교사가 밤거리를 쏘다니며 방황하는 제자들을 찾아다니며 쓴 책을 보고는, 밤거리를 쏘다니는 친구들을 찾아 집으로 데리고 왔다. 술 냄새, 땀 냄새 풀풀 나는 다 큰 남자애들이 마루에 즐비하게 누워 자는 모습을 본 한솔이 엄마는 비명을 질렀다. 최근에는 같은 반 친구와 동성애자로 몰렸다. 한솔이는 같은 반 친구인 유진이 녀석의 솜털 보송보송한 볼따구니를 너무나 사랑했다. 그러면서도 같은 학원에 다니는 여자친구로부터 ‘느끼하게 해줄까?’, ‘넌 날 원하니?’ 같은 문자 메시지들은 계속 받았다. 입시를 앞두고 성적은 나날이 떨어지는데 비전 없고 실속 없는 일들을 하러 제 돈 주고 따라다녔다. 한솔이는 학교에서는 이상한 아이의 대명사, 친구들 사이에서는 동네 복덕방 아저씨 같은 존재였다. 사우디 갔다온 것밖에 내세울 게 없는 한솔아빠실속 없이 친구 챙기랴, 시위하랴 ‘싹수 노란’ 아들
“네가 원하는 건 뭐냐?” “아빠가 원하는 건 뭡니까?” 담임선생님과 그러고 있는 순간에도 주머니 속에 든 휴대폰은 계속 떨렸다. ‘날 원하는 사람들이 이렇게 많다니.’ 한솔은 복도로 나오자마자 문자부터 확인했다. 문자를 확인할 때마다 즉답을 하고 싶었지만 휴대폰 요금을 가지고 꼬투리를 잡을 엄마 얼굴이 떠올라 꾹꾹 참았다. 다음날 아침, 겨우 일어나 눈을 비비고 앉은 아침 식탁. 한솔이 아버지의 사우디 타령은 또 시작되었다.
“결혼 기반을 마련하느라 사우디까지 갔다 와서 늦게 결혼해 낳은 자식들이 이토록 희망이 없다니.” “그러면, 뭐 얼마나 희망이 있을 줄 알았어?” 날카롭기로는 아버지보다 한수 위인 한솔이 엄마의 말이 식탁 위를 싸늘하게 만들었다. 그보다 더한 건 한솔이의 여동생 진솔이었다. 진솔은 깻잎머리 아래로 눈을 흘기며 들릴 듯 말 듯한 작은 목소리로 상욕을 해댔다. “내가 너희들더러 판검사가 되라는 것도 아니고 그저 제 밥벌이나 하라는 건데 이토록 싹수가 없어서야. 난 사우디…” 아버지 입에서 아침부터 사우디란 말이 터져 나오자마자 나머지 식구들 세 명 모두 식탁에서 슬며시 일어나 자리를 피했다. 식구들의 정신 상태야 어떻든, 웰빙족인 한솔이 엄마는 온몸을 비틀었다 늘이고 죄는 아침 운동에 열중했다. 한솔이 아버지는 작은 건설현장 소장으로 있다가 잠깐 쉬고 있었다. 생각보다 실직 기간이 길어져 최근에는 도서관에 다니며 시간을 보냈다. 영악하게 자기 밥벌이를 잘하는 자식들이 되어 달라는 한솔이 아버지의 바람은 어쩌면 아주 단순하고 솔직했다. 부모가 이혼을 해서 형제끼리 사는 친구 집에 놀러 가기로 약속한 토요일 밤, 한솔은 뜻하지 않게 아버지의 결투 신청을 받았다. 친구들끼리는 인사불성이 되도록 소주를 마시고 토해대기도 하지만 아버지 앞에서는 그럴 수 없다고, 자중하리라 결심했다. 그리고 아버지와 늘 옥신각신하는 분위기도 이쯤에서 끝내고 싶은 생각도 없지 않았다. 동네 포장마차. 소주잔이 몇 차례 비자 한솔이는 혀가 약간 꼬이고 현기증이 나는 걸 느꼈다. “너 이제부터 나한테 아빠라고 불러라. 옛날에 너가 날 아빠라고 부르던 때가 좋았다. 자, 아빠, 해봐. 내가 사우디에서 돌아왔을 때 말이다. 우리 사회는 정말이지 혼란스러웠다. 사우디의 모래 바람과…” “저기 아버지, 아니 아빠, 사우디 얘기는 그만 하시구요. 걱정하지 마세요. 전 동성애자가 아니니까.” “물론 아니지, 내가 아닌데 너가 그럴 리가 있냐?” “저기요 아빠. 그건 유전되거나 하는 병이 아니라서 그렇게 얘기하실 건 못 돼요. 그리고 아버지 혹시 기억하시나요? 제가 태어나던 해 10월에 12명의 미결수들이 집단 탈주를 했던 거.” “또 그놈의 유전무죄, 무전유죄 얘기냐? 넌 태어나던 해 일도 기억하냐?” “물론 아닙니다. 하지만 최근에 그 얘기가 영화로 만들어지기까지 했습니다. 기회가 되시면 네이버에 들어가 지식검색을 쳐보십시오. 아 참, 아빤 네이버를 모르지.” “네이버! 나도 안다. 그래서 도대체 너가 원하는 건 뭐냐?” “그 사건의 주인공들처럼 명대사를 하나 만드는 겁니다. 그럼 아빠가 원하는 건 뭡니까?” “너의 성적을 상위 십퍼센트 이내로 끌어올려서 너를 달라지게 하고 싶다.” 한솔이가 갑자기 피식 웃는 통에 한솔이 아버지의 얼굴이 무참히 구겨졌다. 한솔이는 그 사이 병수에게서 온 문자메시지를 받았다. ‘엄마를 만났어. 빅맥 먹고 헤어졌다.’ 이혼하고 따로 사는 엄마를 만난 병수에게 달려갈 시간에 아버지와 이런 구식 대화를 나누고 있다니. 한솔이는 아버지 눈치를 보며 답장을 찍었다. ‘그래서, 너희 엄마는 아직도 너희를 사랑한다고 하시더냐?’ 아버지의 얘기는 계속됐다. “가끔 널 보고 있으면 내가 낳은 자식이 아닌 것 같을 때가 있다. 사우디까지 갔다 와 고생한 몸으로 학비 대고 옷 사 입혀 키운 내가 너한테 이런 감정을 느껴도 되는 거냐?” 순간 한솔이는 아버지한테 무척이나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더 이상 아버지에게 대꾸할 논리를 찾을 수가 없었다. 그래도 아버지에게 희망을 주고 싶어서 한마디 했다. “아빠, 기회가 되면 나중에 사우디에 꼭 한 번 가볼게요.” “미쳤냐 너? 사우디 간 건 나 하나로 됐어. 그런데, 우리 술도 좀 깰 겸 축구 한 판 안 할래? 월드컵도 다가오는데.” “좋아요 아빠.” 흰 꽃가루 날리는 봄밤의 자정 무렵, 한솔이는 집에서 축구공을 들고 나왔다. 공 소리가 봄밤의 허공을 탕탕 울렸다. 그 며칠 후 한솔이 아버지는 다시 담임선생님에게 불려갔다. 담임선생님은 한솔이 아버지를 응접실로 불러 아주 온화한 얼굴로 일회용 커피를 한 잔 대접했다. “선생님, 이번엔 또 무슨 일로 저를 보자고 하셨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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