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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7명에 달하는 조선후기 평양기생과 기방 주변 명사 5명에 관한 일화를 엮어 만든 소품서(小品書)인 ‘녹파잡기‘(綠波雜記). 19세기 초반 한재낙(韓在洛) 저술인 녹파잡기는 명지대 안대회 교수가 두 종류 필사본을 발굴함으로써 알려지게 되었는데 사진은 단국대도서관 연민장서 소장본이다. 이 판본은 필사본을 복사한 것이다./김태식/문화/ 2006.5.25 (서울=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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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대회 교수, ‘녹파잡기’
무려 67명에 달하는 조선후기 '평양기생'의 삶과 애환을 엿볼 수 있는 19세기 초반의 소품문학 책이 발굴, 공개됐다. 이 소품서(小品書)는 지금까지 간헐적ㆍ단편적으로만 전해지던 조선시대 기생들의 일상을 당시 기방문화를 대표하던 내로라 하는 평양기생을 대부분 직접 만난 경험을 중심으로 채록했다. 이는 한국기생사를 체계화한 문화역사학자 이능화(李能和)도 보지 못했다는 점에서 획기적인 자료로 평가된다. 한국한문학 전공인 명지대 안대회 교수는 생몰연대가 정확하지 않은 낙후한 지식인 한재낙(韓在洛)이 쓴 소품서인 '녹파잡기'(綠波雜記)를 최근 찾아냈다고 24일 말했다. 공교롭게도 녹파잡기는 두 종류가 거푸 발견됐다. 하나는 단국대도서관 '연민장서' 소장 필사본의 복사본이며, 다른 하나는 고려대 '육당문고' 소장 필사본이다. 제목에 들어간 '녹파'(綠波)는 고려 중기 때의 저명한 시인 정지상(鄭知常)이 서경을 무대로 쓴 유명한 송인(送人)에 나오는 구절. 연민장서 복사본은 원전격인 필사본이 어디 소장돼 있는지가 현재 파악되지 않으며, 육당문고 필사본은 '서경잡기'(西京雜記)라는 제목이 붙어있다. 전 2권인 녹파잡기는 권1에서 67명에 이르는 19세기 전반 평양지방의 저명한 기생의 일상을 서정성 짙은 문학작품으로 정리했다. 제2권은 평양기방을 주무대로 활동한 당대의 명사 5명에 얽힌 삶을 수록했다. 여기에 수록된 평양기생 대부분은 작자인 한재낙이 직접 만난 사람들이다. 이들 기생에 대해 작가는 용모라든가 인상, 특징과 기예를 중점적으로 서술했다.
예컨대 '죽엽'(竹葉)이란 예명을 쓰는 기생은 작자에게 "첩은 나이 벌써 스물넷이죠. 언젠가 사내를 만나서 그 사람에게 속박되겠지요. 그러면 어떻게 제 평소의 꿈을 이룰 수 있겠어요? 마땅히 봄가을 좋은 날에 명승지를 골라 거문고를 안고 가서 마음껏 노닐어 늙지 않은 이 시절을 놓치지 말아야지요"라고 말했다고 한다. '진홍'(眞紅)이란 기생의 자태에 대해서는 "낮잠을 막 깼을 때 옅은 달무리가 (얼굴에) 생겨 봄날 같으니 교태와 부드러움을 이루 다 표현하지 못할 듯하다...소담하게 화장을 하고 여유있게 앉아서는 붓을 쥐고 난초 잎을 치고 있는데 그 곱고 부드러운 자태가 더불어 모두 향기가 난다"고 묘사하기도 했다. 이런 기록들을 통해 당시 평양기방에서는 경화세족(京華世族)들에 못지않은 최고급 문화가 펼쳐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고 안 교수는 말했다. 이 외에도 녹파잡기에는 평양기생들의 의로움과 기개, 나아가 호방한 멋들을 채록했다. '취란'(翠蘭)이란 기생은 "손가락이 가는 파처럼 섬세"한데 "담박해서 물욕이 없으니 화장품이나 사치품을 남들이 다투어 구하려 하지만 홀로 뒷짐을 지고 있으며 남자들이 간혹 돈으로써 유혹하기도 하지만 그때마다 완곡한 말로 물리치곤 했다"고 한다. 나아가 녹파잡기는 평양기생의 애틋한 삶과 사랑을 증언했다. '초제'(楚제<女+弟>)라는 열한 살 된 기생은 빗길을 가다가 아홉 살밖에 되지 않은 괴불(怪不)이라는 사내아이가 자기가 신고 있던 청사 가죽신발을 벗어준 데 감격해 훗날 언젠가는 은혜를 갚으리라는 결심을 안고 살아간다. 녹파잡기는 현역에서 은퇴한 퇴기(退妓)에 대한 기록도 남겼으며, 당시 평양기방에서 서예나 시, 풍류객 등으로 명망 있던 남성들로는 조광진(曺光振), 홍산주(洪山柱), 안일개(安一箇), 군할(君할<目+害>), 최염아(崔艶兒)의 일화도 채록했다. 이 중 군할이란 사람은 장인으로 퉁소의 명인이었으며, 온갖 새 울음소리를 잘 내어 사람들을 포복절도하게 했다고 한다. 최염아는 기방에서 잡일을 해주며 생계를 유지하는 '조방꾼'이었다. 하지만 이름난 기생이 아니면 다니지 않으므로 그가 어디 있느냐에 따라 기생의 명성과 값이 정해질 정도였다고 한다. 안 교수는 "한재낙은 불행한 태생의 기생들이 보여주는 천박하고 화려한 외부를 걷어내고 그 이면에 도사린 슬픔과 아름다움을 포착하여 아름다운 산문으로 엮어냄으로써 그들이 진정한 인간다움을 구현하고 있음을 보여주고자 했다"면서 "그의 녹파잡기는 문학적으로는 소품서이기도 하나 당시 기방문화와 기생들의 세계를 보여주는 자료로서 매우 중요한 가치를 지닌다"고 말했다. http://blog.yonhapnews.co.kr/ts1406 김태식 기자 taeshik@yna.co.kr (綠波雜記) 공개 기생 67명ㆍ기방주변 명사 5명의 삶 수록=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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