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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6.05.25 19:33 수정 : 2006.05.26 17:29

김찬호/한양대 강의교수·문화인류학과

허리띠 졸라매 장만한 ‘스위트 홈’ 집에서 보내는 ‘집 사람’은 줄어만 가고
미디어 발달할수록 가족 커뮤니케이션은 희박 따스함 스민 ‘홈’페이지를 구축하자

생활 속의 문화사회학

‘늦은 밤 아이가 현관 자물통을 거듭 확인한다 / 가져갈 게 없으니 우리집엔 도둑이 오지 않는다고 말해주자 / 아이 눈 동그래지며, 엄마가 계시잖아요 한다 / 그래 그렇구나, 하는 데까지 삼 초쯤 뒤 아이 엄마를 보니 / 얼굴에 붉은 꽃, 소리없이 지나가는 중이다.’ (이면우 ‘봄밤’)

동물들에게는 생존과 번식을 위한 보금자리가 필요하다. 곤충이나 새들은 자연의 위협에서 자신과 새끼들을 보호하는 은신처를 정교하게 만들어낸다. 인간도 아득한 옛날 동굴이나 움막을 임시 거처로 사용하기 시작했다가, 이후 다양한 주거지들을 창조해왔다. 그 문화유산은 수많은 고고학적 유적지로 전승된다. 인간에게 집은 원초적인 성장의 터전이요, 세상을 배워가는 언어다. 그래서 아이들은 집짓기 놀이를 즐기고, 모래를 가지고 건축을 하면서 ‘두껍아 두껍아 헌 집 줄께 새 집 다오’라며 노래한다. 어른들의 놀이에서도 집이 종종 은유로 사용된다. 바둑에서의 ‘집’, 스포츠에서의 ‘홈런’ ‘홈그라운드’ 등이 그것이다.

근대 이전의 역사에서 집은 인간의 모든 활동이 이뤄지는 삶의 총체적 마당이었다. 그러던 것이 산업화 시대에 생산의 영역이 생활 세계에서 분리되어 나가면서, 집에는 육아와 노인 봉양, 식사와 휴식 등 가장 기본적인 재생산의 기능만 남게 되었다. 여기에서 가정은 끝없는 경쟁으로 치닫는 사회와 달리 안온한 마음이 깃드는 전당으로 여겨진다. 가족끼리 단란한 웃음을 나누는 ‘스위트 홈’, 근사한 인테리어 디자인으로 꾸며진 ‘행복이 가득한 집’에 대한 갈망은 많은 한국인에게 강렬한 성취동기로 작용해왔다.

그런데 그토록 허리띠를 졸라매 ‘내 집’을 마련해놓고서도, 우리는 그곳에서 별로 많은 시간을 보내지 않는다. 노동의 강도가 높아져 남편의 퇴근 시간은 자꾸만 늦어지고, 맞벌이가 늘어나면서 ‘집 사람’은 점점 줄어든다. 또한 집 바깥에서 즐길 수 있는 공간과 프로그램들이 많아지기 때문에 ‘집구석’에 쳐 박혀 있고 싶지 않다. 게다가 휴대폰이 보편화되면서 젊은이들의 귀가 시간도 늦어진다. 예전에는 오로지 집에서만 자신에게 걸려온 전화를 받을 수 있었지만, 이제는 집 바깥에서 얼마든지 그리고 훨씬 자유롭게 통화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모바일’ 시대는 그렇게 ‘부동(不動)산’의 풍경을 바꾸고 있다.

테크놀로지의 영향은 실로 크다. 끊임없이 혁신되는 가전제품 덕분에 가사노동이 많이 수월해졌음은 물론 여가의 즐거움도 배가되고 있다. ‘홈비디오’로 근사한 영상물을 제작할 수 있고, 영화관 못지않은 ‘홈씨어터’를 구축할 수 있다. 그러나 다른 한편 물리적 심리적 엔트로피는 꾸준하게 증가하고 있다. 소비사회에서 자꾸만 늘어나는 가재도구들을 관리하는 일이 만만치 않기 때문이다. 하나둘씩 쇼핑해온 물건들이 어느덧 산더미가 되어 효율적으로 수납되지 않는다. 그래서 평수를 넓혀 이사를 가도 얼마 지나지 않아 비좁게 느껴지게 된다. 이사할 때마다 나오는 엄청난 ‘쓰레기’를 보면서 이토록 많은 잡동사니들을 재워두고 있었구나 하고 새삼 깨닫게 된다.

테크놀로지의 영향은 정보환경의 측면에서 명료하게 드러난다. 재택근무의 가능성은 꾸준히 확대되고, 홈쇼핑, 홈뱅킹, 홈티켓 등 온라인 거래는 급속하게 보편화되고 있다. 또한 지구촌의 뭇 정보를 손끝으로 인출할 수 있고 사이버 교육 프로그램이 늘어나는 상황에서 집안에 앉아서도 질 높은 학습이 가능하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정보를 다루는 일은 점점 복잡하고 번거로워진다. 매일 쏟아져 들어오는 고지서와 상품 카탈로그, 신용카드 할인 정보 등을 파악하여 알뜰하게 살림을 꾸리는데 점점 많은 품이 든다. 더 나아가 재테크를 통해 경제 기반을 든든하게 다지는 일은 나름대로 고도의 전문성을 요구한다. 대학의 ‘가정대학’의 바뀐 명칭처럼, 바야흐로 ‘생활과학’의 시대가 된 듯하다.


그러나 과학이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 영역이 있다. 아이를 낳고 키우는 것, 가족들끼리 화목하게 지내는 것처럼 사람의 손과 마음이 직접 닿아야 하는 일들이다. 친지나 이웃의 도움을 얻기가 점점 어려워지는 가운데 육아는 고립된 상황에서 행하는 힘겨운 노동이 되기 쉽다. 그나마 아이가 어릴 때는 낫다. 몸으로 때우는 일이 많기 때문이다. 아이가 커가면서 부모의 고민은 늘어난다. 사교육에 대한 정보를 꼼꼼하게 챙기면서 주도면밀하게 학습을 기획해야 하는 일이 점점 버거워진다. 뿐만 아니라 아이와 대화하고 관계를 맺는데 어려움이 가중된다. 그것은 가족 전체의 소통 부전과 긴밀하게 맞물려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미디어가 발달할수록 가족들 사이의 커뮤니케이션은 오히려 희박해진다. 귀가 이후 저마다의 취향과 네트워크를 따라 정보를 소비하고 통신에 몰두하는 광경이 흔히 연출된다. 가족 구성원들끼리 눈동자를 마주하면서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을 좀처럼 갖지 못하는 것이다. 집(house)에서 함께 살고 있지만 집(home)이 없는 ‘홈리스들’이다.

전통사회에서 가정은 자연스럽게 생겨나 저절로 유지될 수 있었다. 근대 이후 낭만적 사랑이 결혼의 성립과 존속의 조건이 되고, 급속한 문화 변동 속에서 부모의 권위는 상대화되어 왔다. 거기에다가 극심해지는 경제난과 직무 스트레스, 외형적 성취에 대한 강박적 집착의 만연, 무분별하게 쇄도하는 자극 등의 사회 환경에 가정은 취약하게 노출되어 있다. 이제 가정은 친밀한 정서적 유대와 인간에 대한 예의로 뒷받침되지 않으면 곧 위기에 봉착하게 된다. 모두가 기꺼이 시간과 감정을 투자하고 즐거운 경험을 일궈내며 공동체를 창조해 가는 속에서 그 둥지는 튼실하게 유지될 수 있다. 무심함에 길들여진 타성에서 벗어나 서로에 대해 적극적인 관심을 발동할 때, 집은 성장의 기쁨이 스며드는 삶의 자리가 된다. 그 마음의 ‘홈’페이지를 멋지게 구축하고 업그레이드하자. 반짝이는 눈으로 가족들의 아이콘을 클릭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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