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6.06.06 23:34
수정 : 2006.06.07 01:02
사실주의 연극 거목 지다
그의 좌우명은 ‘빚 없는 인생’이었다. 6일 타계한 극작가 차범석 광화문포럼 회장은 국내에 사실주의 연극을 확립하는 데 공헌한 한국 연극계의 거목이며 맏어른이었다.
고인은 전후문학 1세대로서 전통적 개성이 뚜렷한 사실주의극을 발표하고 이데올로기의 갈등과 민족분단을 객관적으로 그려낸 대표적인 극작가로 자리매김돼 왔다. 또한 그는 한국 극단에서 이해랑, 유치진 등과 함께 등단 50년을 넘긴 몇 안 되는 극작가 중 한 명이자 연출가로 왕성한 활동을 펼쳐왔다.
손진책 극단 미추 대표는 “희곡을 통해 한국의 현대연극을 본궤도로 올려놓은 분”이라며 “가장 늦게까지 현역으로 활동해 국내 현대희곡 문학을 정립한 극작가라 할 수 있다”고 고인을 기렸다.
20대에 이승만 독재정권과 전쟁의 참상을 겪은 그는 자유당 때의 부정부패를 파헤친 <껍질이 깨지는 아픔 없이는>(1960), 6·25 전쟁으로 꿈이 깨져버린 젊은이와 그를 둘러싼 애증을 그린 <산불>(1962) 등 문제작들을 발표해왔다. 특히 고인의 최고 역작이자 우리 연극사에서 ‘리얼리즘의 백미’로 평가받는 <산불>은 숱한 연극무대는 물론 김수용 감독의 영화와 텔레비전 드라마로 만들어졌다. 또 최근엔 극단 신시가 뮤지컬로 제작해 내년에 <댄싱 쉐도우>라는 제목으로 예술의전당에서 공연될 예정이다.
고인은 1956년 김경옥 등과 ‘제작극회’를 창단해 소극장운동을 주도했고, 문화방송 창립에 참여해 연예과장과 편성부국장 등을 지내며 방송극 창작에도 관여했다. 그는 텔레비전 인기 드라마 <전원일기>의 작가로도 유명하다. 이와 함께 1963년에는 김유성·임희재 등과 극단 ‘산하’를 창단해 극작가와 연출가로 활동하면서 ‘연극의 대중화와 직업화’에 앞장섰다.
한국 연극계의 어른답게 그는 평소 입버릇처럼 “우리 연극계가 앞으로 찾아내야 하고 극복해야 할 첫번째 문제는 ‘연극의 전문화’라고 지적하고 싶다”며 ‘성숙한 연극’을 강조해왔다.
깐깐한 성품에 지독한 원칙주의자였던 그를 두고 임영웅 극단 산울림 대표는 “후배들을 야단치는 마지막 스승이었다”고 회고하면서 “젊은 후배들이 연극을 적당히 하고 어물어물하는 것을 보면 반드시 입바른 소리를 하고야 말았고 불의를 보면 참지를 못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사석에서 술도 잘 마시고 노래도 즐겨 불렀으며 특히 살풀이 춤도 잘 췄다고 한다.
정상영 기자
chu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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