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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탁기·냉장고 등의 보급에도 불구하고 평균 가사노동시간은 줄지 않았다. 여성이 혼자 해야할 일은 더 많아졌고 남성은 외려 자유로워졌다. 기존 성관념이 바뀌지 않는 한 기술도입만으로 요여성의 사회적 지위가 바뀌진 어렵다. 사진은 ‘대한민국 남편들 다 벗어라’는 카피를 단 삼성전자 세탁기 광고. <한겨레>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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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자기 등장으로 여성 비서들 단순기능공 전락
세탁기 냉장고 보급에도 가사노동시간 그대로
인공수정 개발로 여성 임신·출산·압박감 더해
기술 자체가 아니라 발전과정 여성 참여가 중요
기술 속 사상/⑨ 기술과 여성
타자기라는 새로운 사무기술이 보편화되면서 여성이 다수를 차지하던 비서들은 능동적인 지위에서 지시받은 문서를 기계적으로 작성하는 수동적 처지로 전락했는가? 가사노동을 돕거나 대체할 수 있는 세탁기와 같은 수많은 기술의 발전으로 여성은 가정에서 해방되어 사회 각 분야에 적극적으로 진출할 수 있게 되었는가? 피임법을 비롯한 각종 생식보조기술은 여성에게 출산과 양육의 다양한 선택권을 보장해줌으로써 여성해방에 일조했는가?
이상의 질문들을 인터넷 토론방에 올려놓는다면 다양한 답변과 그에 대한 재반박이 뜨거운 논쟁을 불러일으킬 것이다. 이처럼 기술과 여성의 관계는 중층적이면서 논쟁적이다. 비교적 최근까지도 이런 질문들에 대한 답변은 대강 ‘기술결정론적’ 시각에서 제시되었다. 기술결정론이란 기술은 더 효율적이고 경제적인 기술이 그렇지 못한 기술을 대체하는 내부 논리에 의해 발전하는데 비해 사회는 그렇게 선택된 기술을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여러 변화를 겪게 된다는 생각이다.
로봇 주치의·자가용 비행기 ‘환상’
2040년이 되면 나노로봇이 몸 안을 돌아다니며 건강을 점검하고 문제가 있는 곳을 즉시 고쳐서 평균수명이 100살을 돌파할 것이라는 최근의 기대에 찬 미래기술 시나리오나, 필자가 어린 시절 들었던, 2000년에는 각 가정마다 날아다니는 자가용 비행기를 한 대씩 갖추어서 전세계 곳곳을 자유롭게 여행하게 되리라는 꿈같은 이야기가 대강 이런 시각을 따른 것이다.
이런 시각에서 기술과 여성을 바라 본 20세기 중반까지의 연구들은 특정 기술이 성불평등을 강화하거나 약화하는 양상에 초점을 맞추었다. 예를 들어 타자기의 도입은 상당한 자율성을 가진 비서로서의 여성의 적극적 지위를 단순한 타자수의 지위로 강등시켰는데 비해, 세탁기는 여성을 힘든 빨랫감으로부터 해방시켜 보다 적극적으로 사회활동이나 여가생활을 즐길 수 있게 해주었다는 분석이 이에 해당한다. 비슷한 방식으로 1970년대 여성해방의 시기에 각종 피임기술은 여성이 자신의 출산능력에 대한 지배권을 다시 획득할 수 있게 해준 것으로 여겨졌다. 당시 페미니스트들은 여성이 피임기술의 도움으로 성생활과 출산 사이의 필연적 고리를 거부하고 보다 주체적으로 자신의 삶을 설계할 수 있게 되었다고 평가했다. 하지만 80년대 이후 구체적인 여러 사례연구를 통해 기술과 여성의 관계를 외부적으로 결정된 기술이 여성의 활동이나 지위에 고정된 영향을 끼친다는 생각이 설득력이 없다는 사실이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영국에서 워드프로세서 등의 사무자동화 기술이 도입되는 과정에서 여성과 기술의 관계가 단순하지 않았음에 대한 연구가 한 예이다. 사무자동화가 여성 사무원들 전체에게 동일한 영향을 주었다기보다는 원래 존재하던 불평등을 심화시키는 결과를 낳은 것이다. 단순한 문서작성에 요구되는 숙련도가 사무자동화 기술의 도입으로 낮아지자, 단순 타자수의 지위는 더욱 낮아지고 전문 비서의 지위는 오히려 높아진 것이다. 이처럼 여성을 동질적인 어떤 집단으로 상정하고 이에 대해 기술이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일방적 영향을 끼치리라고 기대하는 것은 지나치게 단순한 생각이다. 컴퓨터 조판기술의 발전과정에 대한 신시아 콕번의 연구 또한 이 점을 강조한다. 현재 컴퓨터에서 널리 쓰이고 있는 쿼티(QWERTY)체계(키보드의 왼쪽 위 여섯 글자를 따서 이름붙인 문자배열 체계)는 원래 타자기 자판에서 유래한 것이다. 그런데 컴퓨터를 사용한 조판기술이 발달하는 과정에서 쿼티 체계는 강력한 라이벌이자 쿼티와는 매우 다른 라이노타이프 체계와 경쟁해야 했다. 최종적으로 쿼티 체계가 승리를 거두게 된 데는 당시 높은 임금을 받으며 강력한 조직력을 자랑하던 라이노타이프 식자공의 힘을 무너뜨리고 노동의 통제권과 비용절감을 달성하려는 관리자의 이해관계가 중요한 영향을 끼쳤다. 부부 함께 하던 일도 아내 몫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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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사기술과 가사노동 관계를 분석한 코완의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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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욱/한양대 교수·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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