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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6.06.22 19:05 수정 : 2006.06.23 16:18

김찬호/한양대 강의교수

대형마트 공세에 사라져가는 시장 다른 한편에선 새로운 시장이 꾸준히 생긴다
손때 묻은 벼룩시장·자작 예술품 파는 프리마켓…다시금 ‘장터의 추억’이 직조되는가

생활 속의 문화사회학

‘세상 돌아가는 소식과 도시의 유행도 장터에 모인 사람들의 귀와 입을 통해 시골구석까지 퍼져나간다. 또한 시장은 자연스럽게 혼담이 오고갈 수 있는 곳이며 젊은 남녀들에게는 서로가 눈을 맞추어보는 사교의 장이다.(...) 장터에서 들을 수 있는 약장수의 능청맞은 익살과 노랫가락, 깡깡이소리는 부담 없이 즐길 수 있는 서민의 소박한 오락이자 무대예술이다.’ (정승모 <시장의 사회사> 중에서)

우연히 어디를 갔다가 공교로운 일을 만났을 때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한다. 찾아오는 사람들이 많을 때 ‘문전성시(門前成市)’라는 표현을 쓴다. 전통사회에서 시장은 수많은 타인들과 진기한 광경들을 한꺼번에 접할 수 있는 비일상의 시공간이었다. ‘도시’와 ‘시민’이라는 단어에서 알 수 있듯이 시장은 문명의 중요한 모태였다고 할 수 있다. 유대교의 성전 앞마당, 그리스의 아고라, 로마의 포럼 등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면 시장이 열렸고 거기에서 각종 오락과 사교가 이뤄졌다. 동방에서도 시장은 형형색색 풍물의 전당이었던 듯하다. 케텔비가 작곡한 ‘페르시아의 시장에서’라는 관현악곡에는 낙타 떼의 행진, 거지들의 울부짖음, 시종을 거느린 공주의 행렬, 마술사, 뱀놀리기 등의 장면이 묘사되고 있다.

현대사회에서도 시장은 그 사회의 고유한 문화를 진열하는 공간으로, 특히 외국인들의 이국취미를 충족시켜준다. 서민들의 애환이 담긴 전통 시장들은 명물 관광지로 사랑받는다. 세계 곳곳을 여행하면서 거기에서 받은 인상들을 화폭에 담은 천경자 씨의 작품 가운데 ‘쿠스코 시장(페루)’은 남미 인디안 문화의 단면을 담백하게 포착하고 있다. 한국의 경우에도 서울의 동대문 시장은 관광 명소로 자리 잡았고, 성남의 모란시장은 수도권에서 가장 인기를 누리는 재래시장이다. 안타깝게도 대부분의 재래시장은 대형할인마트 등의 공세에 밀려 자취를 감추고 있다. 일부에서는 유통 구조의 합리화, 서비스의 질적 제고, 물리적인 디자인의 개선 등으로 활성화에 나서지만 만만한 일은 결코 아니다.

그런데 다른 한편에서 새로운 유형의 시장이 꾸준히 영역을 넓히고 있다. 벼룩시장, 알뜰장터, 녹색가게 등의 이름으로 불리는 중고품 거래 시장이다. 자신이 쓰던 물건을 직접 들고 나와 좌판을 벌이는 ‘garage sale’에서, 유명인의 소장품들을 기증 받아 일반인에게 판매하는 자선 바자회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형태가 있다. 여기에서 거래되는 물건들에는 주인의 체취와 세월의 흔적이 담겨 있다. 그러니까 여기에서는 단순히 싼 가격에 좋은 물건을 구입한다는 것뿐만이 아니라, ‘손때’에 가득 묻어 있는 시간과 삶의 숨결을 만져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오랫동안 소중하게 간직하던 골동품이 전혀 알지도 못했던 누군가에게 건네진다. 돈을 매개로 이뤄지는 거래지만, 그 액수가 워낙 적기 때문에 실제로는 증여 경제에 가까운 경우도 많다.

벼룩시장의 원어인 ‘flea market’과 발음이 비슷하면서 성격을 달리하는 또 하나의 시장이 있다. 예술가들이 소비자에게 자신의 작품을 직접 판매하는 ‘프리마켓’(free market)이 그것이다. 2002년 월드컵을 앞두고 서울의 홍대앞 놀이터에서 시작된 프리마켓은 이후 전국 각지로 꾸준히 확산되고 있다. ‘일상의 열린 공간에서 정기적으로 예술가들과 시민들이 만나는 새로운 개념의 예술 시장이자 대안적인 문화행사’를 표방하면서 운영되는 이 시장의 분위기는 차분하면서도 활기차다. 그다지 넓지 않은 광장에 오밀조밀하게 부스나 판매대가 세워지고 그 위에 모자, 손수건, 장신구, 수첩, 엽서 등 다채로운 작품들이 진열되어 있다. 그리고 그것을 손수 만든 작가들이 ‘판촉’을 한다. 저녁 무렵이 되면 여러 음악 공연도 곁들여진다. 옛 장터에서 펼쳐지던 각종 예술 무대가 재현되는 셈이라고 할까.

‘프리 마켓’이라는 말은 어색한 조어라고 할 수 있다. 시장이라는 것 자체가 본래 자유로운 것 아닌가? 자유롭지 않은 시장이 있는가? 그렇다. 적어도 예술품 시장은 별로 자유롭지 않다. 진입장벽이 너무 높아서 웬만한 지명도나 인맥이 있지 않고서는 참여 자체가 원천적으로 봉쇄되어 있기 때문이다. 재능이 있어도 기획사를 제대로 만나지 못하면 시장이나 대중매체에 얼굴을 내밀기 어렵다. 그들의 작품을 원하는 소비자가 분명히 존재하는데도 말이다. 바로 그러한 간극을 메우기 위해 ‘인디’라는 이름의 문화 생산이 이뤄지는데, 음악과 영화에서 가장 활발하다. 프리마켓은 미술과 공예의 장르를 중심으로 모색되는 대안적인 예술시장이다. 비주류 내지 아마추어들이 자신의 실력을 즉각 검증받을 수 있는 직거래 장터다. 그렇다고 해서 아무나 물건을 내놓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기존의 시장에 나와 있는 제품들이나 그것을 모방한 디자인은 절대 사절이다. ‘끼’의 순도(純度)를 지키기 위해 또 다른 진입 장벽을 세울 수밖에 없는 것이다.

‘스카보로 시장에 가시나요. (…) 거기 사는 어떤 이에게 안부를 전해줘요. 그녀는 나의 진정한 사랑이었거든요. 그녀에게 삼베옷 하나 만들어달라고 해주세요’ 사이몬과 가펑클의 명곡 ‘Scaborough Fair'는 유럽의 노천 시장을 떠올리게 한다. 그런데 이 곡 자체가 여러 지역을 떠돌아다니던 중세의 무명 음유시인들에 의해 창작되어 오랜 세월 동안 개사되고 편곡되어 왔다. 역사 속에서 시장은 단순히 물건의 거래만이 아니라 이런저런 만남이 이뤄지는 장소였다. 그 낯설음과 우연, 거기에 맺히는 사연들은 삶의 재미이자 예술적 영감의 원천이기도 했다. 오늘 다시금 시장은 추억의 저장고가 될 수 있는가. 문화의 창의성을 빚어내는 그릇으로 자라날 수 있는가. 오랜 된 물건들이 새 주인을 만나는 벼룩시장, 생산자와 소비자가 얼굴을 직접 마주하는 프리마켓은 장터의 즐거움을 가꾸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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